ADVERTISEMENT

사마르칸트에 종이 전해준 건 고선지 장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0호 08면

서기 751년 7월. 지금은 키르기스스탄 영내인 코프로브카 평원. 고구려 후예인 당(唐)나라 고선지 장군은 탈라스 긍라사성을 30㎞쯤 앞두고 숨을 돌렸다. 7만 병력(3만 설도 있음)과 700여 리를 기습해 쳐들어 온 길이다. 성과 주변엔 대식(압바스 왕조)의 연합 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종이 … 옷 … 한국과 중앙아시아, 전통의 만남

바로 전해에 고 장군은 천산산맥을 넘어 석국(타슈켄트)을 정벌, 왕 차비시(車鼻施)와 왕비·왕자·공주를 수도 장안으로 압송했다. 그 공으로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남부를 다스리는 안서도호부의 절도사가 됐다. 그러나 차비시가 처형되자 서역은 들끓었다. 달아난 석국 왕자도 “고선지가 기만과 노략질을 했다”고 호소하며 다녔다. 서역 국가들은 대식과 연합해 안서를 노렸다. 황제(당 현종)는 재출정을 명했다. 다섯 번째 출정이다.

사마르칸트 전통지 제작자 자리프 무흐토로브와 한지 제작자 장용훈 무형문화재 16호 지장이 종이 제작을 시연하고 있다. 원료와 제작 과정이 아주 비슷하다고 두 사람은 말했다. 외교통상부 제공

후에 ‘탈라스 전투’라고 불린 이 싸움은 짧았다. 5일. 고구려 유민 사계(史鷄)의 아들로 절도사까지 올랐던 고선지는 대패했다. 살아남은 자는 수천 명. 고선지는 절도사에서 물러나 안녹산의 난 때 토벌군 책임자인 토적부원수로 복귀했으나 모함에 걸려 755년 12월 형장에서 칼을 받았다. 탈라스전의 패배가 서구 문명의 도약대를 제공하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죽었다. 씨앗은 포로로 끌려간 2만 명 가운데 포함됐던 제지공이었다.

근대 종이의 원조인 채후지는 후한 4대 황제 화제(105년) 때 채륜이 만들었다. 종이는 그러나 751년까지 파미르 고원(신장)을 넘지 못했다. 고원 서쪽에선 이집트산 파피루스가 종이를 대신했다. 그 흐름을 탈라스전이 바꿨다.

28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한국과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의 복식교류전 ‘실크로드의 빛과 색’ 갈라쇼가 열렸다. 중앙아시아와 한국의 복식 문화를 통해 문화적 원류를 찾는다는 취지다. 외교통상부가 주관하고 한복진흥회와 한복산업마케팅연구소가 진행했다. 신동연 기자

포로가 된 제지공은 아라비안나이트 도입부에 나오는 유명한 도시 사마르칸트로 보내졌다. 최초의 제지공장이 생겼고 명품 ‘사마르칸트 종이’가 탄생했다. 이후 종이는 중동과 유럽으로 널리 퍼져 문명의 토대가 됐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은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가 패하지 않았다면 종이의 유럽 전파가 없었고, 종이가 없으면 르네상스가 어려웠고, 산업혁명도 늦어졌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견해”라고 말했다.

한반도에는 사마르칸트에 종이란 개념조차 없던 4세기께 종이가 들어왔다. 일본으론 7세기에 전해 줬다. 후한시대에 시작된 ‘페이퍼 로드(paper road)’가 4세기 한반도에 동진(東進)의 거점을 마련하고, 다시 8세기 중반 역시 같은 한반도의 후예인 고선지의 패배를 통해 사마르칸트에 서진(西進)의 거점을 마련하기까지 600여 년이 걸린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피’를 통해 문명의 도약대를 제공한 한지와 사마르칸트지가 ‘종이 탄생’ 1903년 만에 처음으로 28일 서울에서 만났다. 종이 사촌 간의 첫 만남이다. 외교통상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동 주최하는 실크로드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한지-사마르칸트지 교류전:페이퍼 로드를 찾아서’의 제작 시연 자리에서다.

제작 과정은 아주 비슷했다. 사마르칸트의 전통 제지공인 자리프 무흐토로브씨는 “두 종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제작 과정이 아주 유사하다”고 놀라워했다. 함께 시연한 경기도 무형문화재 16호 지장 장용훈씨는 “종이 원료와 잿물을 사용하는 방식, 종이를 다듬는 방망이 등 흡사한 게 많다”며 “중국·일본과 달리 뽕나뭇과의 나무 껍데기를 원료를 쓰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했다. 전통 종이가 시련을 겪는 것도 비슷하다. 전통 한지 제지공은 지금 한 손으로 셀 정도. 사마르칸트지의 전통도 소련 시절 거의 끊겼다가 무흐토로브의 노력으로 겨우 맥이 이어졌다.

사마르칸트와 한반도의 관계는 뜻밖에 오래됐다. 사마르칸트 교외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엔 7세기 후반 와르후만 왕을 만나는 외국 사절단 12명의 그림이 있는데, 그중 두 명이 고구려인이다. 726년 신라 고승 혜초는 강국(康國)을 들렀다고 『왕오천축국전』에 썼다. 강국이 사마르칸트다. 1402년 김사형·이무·이회 등 3인이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100여 개의 유럽 국가와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나온다.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로 평가받는다. 사마르칸트는 살마나사(撒麻那思)로 기록됐다.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살마아한(撒馬兒罕)으로 나온다. 조선시대 제작된 혼천의(지구의) 같은 천문기기도 사마르칸트의 울루그 베그 천문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정수일 소장은 지적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