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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세보다 재정지출 확대가 바람직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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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호 10면

이헌재 전 부총리는 이날 강연에서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을 직접 비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서 현 정부의 정책과 반대되는 입장을 밝혔다.

이헌재 입에 쏠린 시장의 눈

그는 우선 거시경제 정책 운용과 관련, 감세보다 재정지출 확대가 낫다고 했다. 현 정부 경제팀 내에서는 감세(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와 재정지출(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두 사람의 손을 다 들어줬다. 하지만 이 전 부총리는 당장 급할 때는 재정지출이 낫다고 봤다. 다만 일본의 장기 불황 등의 사례에서 볼 때 경험적으로 재정확대 정책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남겼다. 강연회에 참석한 한 금융계 인사는 “경기 활성화에 재정지출 효과가 더 빠르다는 것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얘기”라고 말했다.

또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에 대해선 헛돈을 쓸 가능성이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한반도 대운하사업에 부정적임을 시사한 셈이다. 이 전 부총리는 아예 구체적 용처까지 얘기했다. 차라리 농촌 하수처리시설 확충 사업처럼 언젠가 해야 할 사회적 기반 사업이나 에너지 절약 효율화 사업 같은 곳에 돈을 쓰라는 것이다.

경제팀에 직접 훈수를 두기도 했다. 그는 “정부와 한국은행의 엇박자, 위기 상황인데도 독립성에 집착해 늑장 대응을 하는 한은, 자기 부처부터 챙기는 관행 등이 문제다. 이원적 금융감독 조직은 비상시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정부 내 불협화음과 애매한 정책은 불안만 키운다”고 비판했다.

국내 금융(금융위원회)과 국제 금융(기획재정부)의 통합 운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했다. 그는 “분명한 것은 지금 정부 내에, 정부 밖에, 학계에 유능한 사람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라며 “일할 분위기가 주어지면 이 정도 문제를 처리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경제부총리 직제 부활에 대해선 “부총리가 있고 없고는 지엽적 문제다. 공조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은 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말도 했다. “평상시에는 견제가 필요할지 몰라도 위기 때는 걸림돌이 된다”는 설명이다.

물론 긍정적 얘기도 많이 했다. 그는 ▶외환위기 때보다 국제 협조가 잘 되고 있고 ▶중국 경제가 잘 버티고 있으며 ▶세계 금융시장 재편이 한국 금융회사에 기회가 될 수 있고 ▶산업·기업은행 같은,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국책 금융기관이 많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의 미래 금융시장 전망도 눈여겨볼 만했다. 금융위기가 새로운 경향을 만들고 부실여신(NPL)과 구조조정 기업 등이 쏟아질 것이며, 그 결과 사모펀드(PEF)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블랙스톤 등 사모펀드가 이런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사모펀드가 투자은행의 기능을 대체하거나 투자은행 스스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변신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금융공학의 힘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봤다. 그는 “이번 위기로 쏟아지는 부실여신 같은 금융 쓰레기는 금융공학 상품이 빚어낸 결과지만, 이런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도 상품을 직접 만든 사람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결국 금융공학 기술자들은 일시적으로 직장을 잃을 수 있지만 이들은 곧바로 기회를 찾아 움직일 것으로 전망했다. ‘모피아(옛 재정경제부, 특히 금융정책국 관료를 미국 범죄집단인 마피아에 빗댄 말)’를 포함한 금융 기술자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올 3월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금융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데다 금융회사가 금융기관이라 불리며 권력기관 행세를 해 온 것은 관치금융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장을 쥐고 흔들어 온 금융 관료들에 대한 질타였다. 비슷한 시기,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인사 청탁을 예로 들며 “그러니까 ‘모피아’라는 말을 듣는다”는 말도 했다. 실제 금융위원회 인사에서 관료 집단은 배제되고 금융위원장(전광우)과 부위원장(이창용)엔 민간 출신이 기용됐다.

한편 이날 강연회에는 ‘이헌재 사단’으로 불리는 인물이 다수 참석했다. 이들은 대부분 자산운용사·은행·증권사 등 ‘시장’에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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