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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덫’ 걷어낼 소통의 원칙이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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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호 35면

금융위기는 신뢰가 무너진 결과다. 신용경색이란 상대방의 신용을 믿지 못해 금융거래를 기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결과 경제 전반이 침체되고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신뢰의 부족으로 더 나은 대안이 있음에도 열등한 현실에 갇히게 되는 경우는 비단 금융시장뿐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그렇다. 게임이론에서 배우는 것 중에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라는 것이 있다. 두 사람의 공범이 체포돼 경찰에서 따로따로 취조받게 될 때 둘 다 자백하지 않고 경미한 처벌을 받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최선의 결과다.

그러나 둘이 서로 소통할 수 없고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경우에는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은 자백하는 것이 되고 그 결과 둘 다 자백하여 장기 형(刑)을 살게 된다는 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다.

경제나 정치가 흔히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본다. 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소통과 신뢰를 쌓아 가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소통이 활성화된다고 반드시 신뢰가 쌓이는 것도 아니다.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에서처럼 익명성에 숨어 근거 없는 말들을 소통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사회 전반에 불신이 확산될 수 있다.

필자가 영국에 근무하면서 그곳의 제도와 관행 중에 우리나라에도 꼭 도입해 정착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채텀하우스 룰(Chatham House Rule)’이라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가 1927년 만든 것으로, 이미 영어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회의에서 토론되거나 발표된 내용에 대해서는 보도나 인용이 가능하지만 그 모임에서 의견을 발표한 사람의 이름이나 소속에 대해서는 보도·인용해선 안 된다는 룰이다.

회의 참석자들은 그 회의에서 들은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으나 ‘어디에서 일하는 누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는 얘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회의에서 토의되거나 발표된 내용 자체도 보도·인용해서는 안 되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보다는 느슨한 룰이다.

그러나 이 룰이 적용되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본인이 소속한 기관의 입장이나 지위를 떠나 자유로이 개인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토의에서 훨씬 더 깊이 있는 정보와 진솔한 의견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근거 없는 얘기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토론된 내용이나 정보는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기 때문에 전 사회적으로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이 공유되고 깊이 있는 의사소통이 이뤄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토론과 소통이 부족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진솔한 의견교환이 본인에게 부담이 돼 돌아오는 경우가 너무나 잦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정책 담당자이거나 기업 경영인이거나 가능한 한 말조심을 하고 진솔한 의견표현을 하지 않으려 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적인 토론 자리에서 형식적 입장 표명만으로 겉도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제대로 소통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정책이나 시장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익명성에 숨어 인터넷을 통해 책임과 근거도 없이 토해 내는 주장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사실로 믿고 싶어하는 사회적 현상에 빠지게 된다.

‘채텀하우스 룰’은 그것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음부터 모임에 참석하는 문호를 닫을 수는 있다. 누가 그런 말을 퍼뜨렸는지에 대해 조사하기도 어렵다. 참석자들의 양식을 존중하고 참석자들은 그 룰을 지켜 냄으로써 그 사회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지식을 전수하며 깊이 있는 토론으로 사회적 난제들에 대한 접점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사회적 자본’이다. 민주사회에서 각자가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이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도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하에서 시의적절한 정책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이러한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 우리도 모임이나 회의에서 ‘채텀하우스 룰’을 널리 적용해 보면 어떨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시민사회의 룰을 지키는 절제를 몸에 배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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