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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12년간 개미처럼 모았더니 ‘그림치’도 컬렉터 되더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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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미술잡지를 꾸준히 구독할 것, 예산을 밝히고 화랑 관계자와 상의하길 주저하지 말 것”. 전시장서 만난 이충렬씨는 초보 컬렉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최승식 기자]

“그림은 이민자의 향수를 달래주는 고향 친구였고, 가족애를 북돋우는 또 하나의 가족이었습니다.”

미국서 잡화점을 운영하며 12년간 소품을 하나씩 사 모은 이충렬(54)씨가 그간 맺은 그림과의 인연을 책으로 묶었다.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김영사)이다. 출간에 맞춰 26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창성동 갤러리 자인제노(02-737-5751)에서 아끼던 소장품을 공개하고, 초보 컬렉터를 위한 소품전도 준비했다.

#떠남

1976년, 스물두 살 국문학도가 몰락한 부모와 함께 고국을 떠났다. 대학 3학년 중퇴였다. 미국 LA에서 봉제공장 보조로 한 푼 두 푼 모았다. 가족은 그렇게 해서 2년 뒤 미니수퍼를 차렸다. 청년은 여기서 결혼도 했고, 삼남매도 낳아 길렀다. 13년 뒤 애리조나주로 떠났다. 사막과 구릉이 있는 허허벌판 국경변에 잡화점을 차렸다. 성탄절과 새해를 빼고 361일,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생활이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봤고, 조선시대 옛 그림을 보게 됐다.

#만남

그림을 집에 걸어두면 매일 고국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심하고 국내의 미술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95년 모처럼 고국에 돌아와서는 인사동 화랑가를 서성였지만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 1년 뒤 미국서 화랑 인터넷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마침 작은 그림들이 소개돼 있었다. 용기를 내 담당자에게 “미국 사는 동포인데 집 벽에 걸어놓고 아이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50만원에서 100만원 사이의 그림을 추천해 달라”고 e-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소개받은 그림이 임효의 ‘꽃비’, 100만원이었다. 월수입 400만원 중 300만원이 생활비로 나가던 때였다. 한 달 20만원 예산으로 시작하면 1년에 그림 두 점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계산해 큰 맘을 먹은 것이다.

#나눔

집에 그림이 하나 둘 걸리자 신이 난 건 가족들이었다. 자녀들은 새 식구 기다리듯 아버지가 새 그림 골라오길 기대했다. 미국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은 그림을 통해 한국 문화를 익혔다. 큰딸은 “인생을 바꾼 계기를 쓰라”는 대입 에세이에 그림과의 인연을 적어 스탠퍼드 대학에 합격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대학에 진학하자 학비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 사이에 값이 오른 그림 몇 점을 처분하니 빚을 지지 않아도 됐다. 횡재는 이우환의 소품. 화랑 권유로 평소 예산을 초월하는 1350만원에 산 ‘조응’ 연작이었다. 18개월간 그림값을 나눠내며 겨우 산 ‘조응’은 몇 년 후 경매에서 1억6000만원에 팔려 큰딸의 결혼자금이 됐다.

#발굴

애정은 발굴로 이어졌다. 잊혀진 근대미술가 임용련(1901∼?)의 ‘십자가의 상’을 미국의 허름한 화랑에서, 운보 김기창의 청년 시절 그림 ‘판상도무’를 미국의 경매 사이트에서 찾아냈다. 1920년대 미국에 미술 유학을 갔던 임용련 화백은 이중섭에게 화가가 될 것을 권한 스승이기도 하다.

개미 애호가에게는 언감생심일 정도로 몇 년 새 그림값이 오르지 않았느냐고 반문해 봤다. 이씨의 말이 빨라졌다. “100만원 내외에 살 수 있는 그림은 여전히 많다. 가령 젊은 작가 중에서 한국 미술계를 이끌 중진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애호가로서는 더 기쁜 일 아닌가. 이왈종·사석원 선생도 젊은 시절 작품값은 쌌다.”

처음 월 20만원 예산으로 시작한 그의 그림 수집은 월 100만원으로 커졌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개미 애호가를 자처한다. 현재 그의 소장품은 200여 점, 이 중 돈이 필요할 때 되판 것은 7∼8점에 불과하다. 

권근영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이충렬씨가 말하는‘초보 컬렉터, 이렇게 시작하라’

- 첫 그림을 위한 예산은 20만∼50만원 정도: 집에 그림 사서 걸어두는 재미를 처음 느끼는 수업료 정도의 비용이라 생각해야 한다. 무리할수록 그림이 돈으로 보이게 된다.

- 오랜 역사의 전시화랑을 택한다: 오랜 세월 작가를 선택하고 지원해 온 안목있는 화랑이 믿고, 배우고, 거래할 만하다.

- “소품도 있습니까”로 시작하라: 대개의 화랑은 전시작 외에 작은 크기의 저렴한 그림을 챙겨두고 있으니 예산을 말하고 기탄없이 상의하라.

- 되팔 생각을 한다면 경매 작가의 소품에 주목하라: 우리나라 경매에 올라오는 작가는 100명 언저리다. 이들 작가의 소품이나 드로잉 등은 추후 되팔기가 수월하다.

- 공짜 수업은 없다: 스스로도 공부해야 그림보는 안목도 생기고, 재미도 있다. 미술잡지를 꾸준히 구독하면 흐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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