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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스피커는 소리에 옷 입혀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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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디오 스피커 디자이너 유국일(44)씨의 어린 시절 최고 장난감은 아버지의 손때 묻은 전축이었다. 뾰족한 바늘 끝이 닿은 음반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의 음악이 되살아나는 게 신기해 전축 옆에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 그의 사무실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전축과 그가 디자인한 스피커들이다. 벽면에는 베토벤부터 퀸·김추자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반과 CD가 빼곡하다. 사람이 아니라 소리가 주인공인 공간이다. 깨지기 쉬운 보물이라도 다루듯 CD를 꺼내 튼 뒤 던지는 질문. “어때요, 소리가 보이지요?”

유국일씨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금속 스피커 ‘레아’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안성식 기자]


금속 스피커를 디자인하는 유씨는 제대로 된 스피커라면 소리를 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좋은 스피커는 소리에 공간감과 깊이라는 옷을 입혀줍니다. 그중에서도 금속이라는 재질은 소리를 정직하게 전달하지요. 소리를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거예요.” 메탈사운드디자인(MSD) 대표인 그가 ‘소리를 보고 만지는 남자’로 통하는 이유다. 일반 CD를 틀었을 뿐인데 첼로의 활이 줄과 마찰하는 소리며, 전설적 영국 록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숨소리까지 손에 잡힐 듯하다. “라이브 공연 때와 똑같은 소리를 재현하는 게 궁극적 목표”라고 했다.

그의 스피커 철학은 한국 밖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가전박람회인 CES에서 세 차례나 수상했다. 2005, 2006년에 이어 올해엔 혁신상을 받았다. 이달 초 수상 소식을 들었다.

유명 스피커 부품 제조사인 독일 아큐톤의 명장들도 그를 명인으로 인정해 ‘마이스터’라고 부른다. 처음엔 명함 한 장 달랑 들고 독일로 여러 번 날아가 아큐톤 측을 설득했고, 수년간 협업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스피커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실력으로 인정받아 기쁘지요.” 독일제로 제품을 출시해 값을 더 받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그 나름의 애국심이었다.

음악과 미술의 기로에서 고민하다 둘을 아우를 수 있는 스피커 디자인을 택한 게 1993년이다. 처음부터 무작정 제작에 손대진 않았다. “6년을 독학했어요. 오디오를 사다가 일일이 분해하며 소리의 공학을 익혔지요. 99년 말에야 첫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나무나 플라스틱과 같은 소재에 비해 금속은 가공이 까다로워 스피커 소재로 많이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홍익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그의 생각은 다르다. “금속은 사실 굉장히 부드러운 소재예요. 녹이면 물과 같고 잘만 다루면 자유자재로 깎을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음을 왜곡시키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즐겨 쓰는 소재는 두랄루민. 가볍고 단단해 비행기를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우주·자연 등의 테마로 도안을 그리고, 제품을 만들고 소리 조율까지 모든 일을 도맡는다. 조금만 흠집이 생겨도 바로 폐기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인 그가 특히 신경쓰는 건 소리 조율이다. 스피커가 제대로 소리를 내는지 알아보기 위해 종종 오전 3시쯤 사무실에 나와 베토벤 음악을 튼다. ‘절대적 고요’를 찾아서 조용한 새벽에 치르는 경건한 의식이다.

그의 소리를 즐기는 건 쉽지 않다. 일단 가격의 장벽이 높다. 고급 하이엔드 스피커인 그의 ‘작품’은 대당 9000만원을 호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엔드 스피커 시장에선 그다지 비싼 게 아니라고 한다. “사실 스피커 한 대를 제작할 때마다 3억원은 족히 들어요. 돈 많이 벌었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빚도 있어요.” 한 대에 몇 억원이 넘는 하이엔드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선 입소문이 자자하다. 그의 스피커를 다섯 대 이상 갖고 있는 매니어도 있을 정도다.

15년간 스피커 제작이라는 한우물만 팠지만 색다른 꿈도 꾸고 있다. 스피커를 이용한 대지예술이다. “사라져 가는 소리를 채집하는 거예요. 뒷골목에서 아이들이 축구공 차는 소리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넓은 사막에 수많은 스피커를 설치하고, 그 소리들로 일종의 음향예술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보다 가까운 미래엔 많은 이가 즐길 수 있도록 일반형 스피커도 만들어 소외계층에 보급하고 싶은 계획도 있다. “소리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어요. 아름다운 소리에 감동해 눈물까지 흘린 경험을 나누고 싶은 거지요.”

전수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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