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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실용적이어야 디자이노크라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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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불황일수록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 커집니다. 요즘에야말로 새로운 제품을 지속적으로 내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기를 극복하겠습니까?”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48·사진)가 한국을 찾았다. 프라다·소니·아우디·겐조 등의 제품을 디자인했고, 한화그룹 CI(기업 이미지 통합)와 현대카드 VVIP 카드 ‘the black’디자인을 맡아 유명해졌다. 그는 한화그룹에서 기획한 ‘2008 한화 드림 컨퍼런스’에서 강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최근의 세계 경제 위기를 타개할 핵심 전략으로 ‘디자인’을 꼽았다. “1983년 도시바 노트북 디자인을 맡은 것이 첫 일이었습니다. 무게가 14kg에 달하는 당시 노트북은 디자인이랄 게 없었고 기업이 원하는 것도 튀지 않는 디자인이었습니다. 80년대 기업들은 위험을 최소화하는 ‘미투(me too)’전략으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별화 만이 살 길이고 디자인이야말로 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됐습니다. 제품 디자인이 기업 철학을 대변하는 시대가 온 것이죠.”

그는 “경제 위기는 명품 브랜드들이 스스로 돌이켜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최고 품질로 승부를 겨루던 그들이 최근 들어 브랜드만 믿고 형편없는 제품을 내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초심으로 돌아가 혁신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80년대 캐나다에서 촉망 받는 디자이너였던 93년 갑자기 뉴욕으로 갔다. “세계 최고 디자인 시장인 뉴욕에서 인정받고 싶어 무작정 떠났습니다.” 당시 그가 가진 돈은 1500달러. 그 돈을 털어 브루클린 한 귀퉁이에 욕실도, 부엌도 없는 단칸방을 얻었다. 집 근처 디자인스쿨에서 강사로 일하며 근근이 살았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소품·LP판 등 아끼던 소장품도 모두 처분해야 했다. “생활비를 최소로 줄였어요.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1달러로 뉴욕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객을 찾기 위해 100개도 넘는 기업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 중 딱 한 곳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받았어요. 식탁 위에 올려놓는 생활 소품 3점이었는데 한 해 매출 300만 달러를 올렸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됐습니다.”

라시드는 유명 기업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진공청소기·쓰레기통·꽃병 같은 생활 소품도 만든다. 그는 ‘디자이노크라시(designocracy)’라는 말을 즐겨 쓴다. “‘디자인 민주주의’라는 뜻입니다. 대중이 합리적인 가격에 실용적인 디자인 제품을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수를 위한 디자인이 아닌 만인을 위한 디자인을 말합니다. 그것이 25년 전 디자인을 시작할 때부터의 소신입니다.”

글=이에스더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카림 라시드=이집트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이로·오타와·파리·런던에서 살았으며 뉴욕에서 산업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30여 개 국의 400여 기업과 함께 디자인 작업을 했다. 가구·가전제품·패션·제품포장·호텔·식당 등 여러 방면에서 일한다. 뉴욕현대미술관 등 세계 14개 유명 미술관에 70여 점의 작품이 영구 전시돼 있다. 저서로는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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