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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교류서 인류 공생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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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6일 공식 출범하는 ‘(사)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을 맡게 된 실크로드 전문가 정수일 씨. 서울 옥인동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문명교류학의 비전에 대해 말하고 있다.

74세의 노학자는 올해만도 다섯 차례 해외 답사를 다녀왔다.

러시아 시베리아, 레바논 등 서아시아 3개국,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몽골 등이다. 연말엔 동남아 방문이 예정됐고, 내년 1월엔 북아프리카를 찾는다. 동·서, 남·북 문명 교류의 역사적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답사단 젊은이들 앞에선 때론 나이 든 ‘관광 가이드’ 역할이기도 하지만, 수백 수천 년 전의 문명 교류를 추적하는 시간 여행 속에선 삶의 나이가 무색하다.

이 정력적인 학자는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다. 필리핀계 레바논인으로 위장해 고정 간첩으로 암약하다 1996년 검거된 ‘깐수 사건’의 그다. 2000년 출소 뒤 학계로 돌아간 그의 오랜 꿈이었던 ‘(사)한국문명교류연구소’가 26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창립기념식과 함께 공식 출범한다.

실크로드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그가 소장을 맡고 문명 교류 연구를 하나의 학적 대상으로 정립시키겠다는 야심을 펼친다.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 확산시대”라는 것이 정 소장의 진단이다. 그를 만나 ‘문명 교류학’의 비전에 대해 물었다.

-2006년부터 ‘실크로드 학교’를 열고 대중 강좌를 펼쳐왔다. 대중 강연을 넘어 ‘문명교류학’이란 무엇을 말하나.

“문명교류는 새로운 학문이다. 선진국에서도 아직 본격적인 학문 연구 단계는 아니다.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확산시대다. 교류만이 생존의 길을 보장받을 수 있다. 문명교류에서 인류 공생공영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요새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많지만 이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하지 않아서다. 새로운 것을 개척하면 위기는 없다. 한국에서 ‘문명 교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선보이고 싶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같은 저작도 이미 있는데.

“문명충돌론은 대안이 되기 어렵다. 자기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일방적인 보편주의는 폭력적이다. 인류 문명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각 지역이 수천 년간 지키고 가꿔온 고유의 문명에 대한 발굴과 재평가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보편문명(Universal Civilization)을 추구할 수 있다.”

-인류의 ‘보편문명’을 말하면서 줄곧 민족주의를 강조해 왔다. 이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당하게 ‘민족주의는 역사의 보편가치’라고 믿는 사람이다.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 유럽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문제다. 서구적 근대의 산물로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연결되고 따라서 없어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하지만 동양은 다르다.”

-세계화 시대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세계화는 방향은 옳지만 경제 논리만이 강조됐다. 세계화는 각 지역의 문명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추구해야 한다. 민족주의에 문명·문화적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 민족주의를 민족국가 수립의 논리나 운동의 이념으로만 봐선 안 된다.”

-국내적으로는 ‘다문화 주의’의 문제로 나타난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대외관계가 활발하고 개방적이었을 때 가장 발전하고 선진화됐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절대로 배타적일 수 없다. 이는 보수주의의 이념이 아니다. 고려 초기 100년 동안 중국·일본·말갈·베트남 등지에서 17만 명이 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구 230만 명이었던 때다. 고려시대 때 60개 성(姓)이 귀화했고, 폐쇄적이라던 조선 시대도 30개 성이 귀화했다. 2005년 통계로 한국은 275개 성이다.”

-민족을 ‘혈통’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 문제라는 말인데.

“이제 와서 이주 노동자 문제를 갖고 새로운 현상인 듯 호들갑을 떠는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강하고 우리의 문화수준이 높을 때 외래 문화가 우리 속에 용해돼 하나가 됐다. 요샌 진보 쪽에서 ‘민족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문명교류의 측면에서 민족주의는 오히려 강조돼야 한다. ‘교류’를 위해선 다양한 요소가 필요하며 민족이 만들어낸 문명이 그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연구소의 운영은.

“일단 역사 속에서 한국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수광의 지봉유설 ▶박지원의 열하일기 ▶최한기의 지구전요 ▶민영환의 해천추범 등의 기본적 사료를 갖고 연구팀을 구성해 학습하고 있다. 문명교류는 역사 공부만이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했던 고대-중세 때의 문명 교류에서 근대의 문명교류가 추가되고 정보화 시대에서 문명교류의 비전을 찾아야 한다.” 

글·사진=배노필 기자

◆정수일 소장은=1934년 중국 옌볜에서 출생해 중국 베이징 대학 동방학부를 졸업했다. 중국 공산당 첫 해외 국비 유학생으로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공부했다. 60년대 초 중국 외교관으로 모로코 대사관 근무 중 알제리 전쟁을 접하며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이때 중국 공산당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북한으로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평양 외국어대학교 교수 등을 지낸 뒤 84년 외국인으로 위장, 남한에 잠입해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복역했다. 저서에 『신라·서역 교류사』『씰크로드학』 『문명교류사연구』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한국 속의 세계(상·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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