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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어려운 요즘 ‘희망 전도사’로 나선 산악인 엄홍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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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세상이 온통 을씨년스럽다. 날씨도 그렇고, 사람들의 표정도 그렇다. 날씨야 계절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지만 인간사는 왜 이러는지…. 언제부터인가 신문이고 방송이고 경제, 경제하더니 이젠 아예 사람사람이 얼굴에 쓰고 다닌다. 물가는 오르고 장사는 안 되고. 벌써 ‘망가진’ 사람들이 속출하고 그나마 목을 붙이고 있는 이들도 내남 없이 시한부 인생인 양 전전긍긍하고 있다. 불과 10년 전 그 난리를 겪고도 또 이러니 도대체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참 신산한 세월이다. 하지만 사람들이여, 어둠이 무서워 찬란한 아침을 포기할 텐가? 세상을 노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용기를 갖자. 그래도 안 된다고? 그렇다면 이 사람을 만나볼 일이다. 바로 산악인 엄홍길(48·트렉스타 이사)씨 말이다. 그는 히말라야의 8000m 급 고봉 16좌를 세계 최초로 완등한 사람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숱하게 넘긴 그의 인생 얘기를 듣노라면 지금의 팍팍함은 그야말로 “그까짓 것” 아니겠는가? 바람만 스쳐도 서럽고 좌절을 눈덩이 굴리듯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그의 산악 인생은 더없이 생생한 ‘복음’이다. 그의 말은 진솔하다. 남의 말을 빌리거나 지어내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일만 얘기한다. 그래서 더 와 닿는다. 그는 지난해 16좌를 마치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희망 전도사’ 활동을 펴고 있다. 그는 말한다. “힘들다고 돌투성이 길에서 주저앉으면 꽃길을 볼 수 없다”고. 그리고 묻는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습니까?”

엄씨는 이달 초 히말라야를 다녀왔다. 기자도 동행했다. 해발 2840m의 루크라를 출발해 해발 3930m에 위치한 팡보체까지의 트레킹이었다. 당초 이번 트레킹은 경제난을 맞아 기업인(CEO)들을 위한 현장 교육 프로그램으로 기획됐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려면 사전 준비, 조직관리, 위기관리, 팀워크, 리더십 등이 어떠한지를 엄씨가 현장에서 만나는 상황마다 경험을 소개함으로써 기업에 접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출발 직전 경제 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출발 참가 기업인들이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대부분 취소, 졸지에 셰르파까지 합쳐 14명의 단출한 트레킹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엄씨와 보다 가까이서, 보다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트레킹 코스의 전체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험준한 히말라야의 산길을, 그것도 백두산 꼭대기(2744m)에서 다시 북한산(837m)보다 400m쯤 더(고도로 치자면) 수직으로 오르는 길이라 걷는 데만 닷새 걸렸다. 고소(高所) 적응을 위해 팍딩(2811m), 남체바자르(3440m)·샹보체(3720m)·텡보체(3860m)에서 하룻밤씩 묵으면서 팡보체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부분 ‘초짜’들이라 걷기도 부실한 데다 산소 부족에서 오는 고소증에 시달리느라 힘든 여정이었다. 물론 그는 쌩쌩했다. 오히려 그에겐 일행들의 더딘 걸음이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고봉을 오르는 데 비하면 평지와 같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자상했다. 끝없이 “등반은 인내의 예술”이라며 힘들어 하는 이들을 격려했고, 그렇다고 서두르는 기색이 있으면 ‘한 걸음’의 미학을 얘기하며 군기를 잡았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우리는 하나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를 복창시키며 팀워크를 강조했다. 영락없는 전장(戰場)의 장수였다. 우리가 그를 ‘엄 대장’이라 부르는 것은 원정대의 대장(隊長)이기 때문인 것 같지만 속살로는 ‘대장(大將)’의 뜻이 진하다.

엄홍길씨(左)가 셰르파의 미망인을 위로하고 있다.


“목표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과정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허투루 생각했다간 큰코다치는 건 물론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엄벙덤벙 운 좋게 목표에 도달했더라도 그건 한 번이지 결코 다음엔 사달이 생기고 맙니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게 인생살이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는 ‘엄 대장’은 세 살 때 부모가 상경하는 바람에 원도봉산 기슭에서 산을 놀이터 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암벽을 탄 건 중 2때부터. 고교 졸업 후 설악산에서 살며 국내 산이란 산은 모두 섭렵했다. 군 복무도 해군 일반병으로 있다 자원해 특수부대(UDT)에서 마칠 정도로 모험을 즐기는 강골이었다. 그런 그가 히말라야를 넘본 건 어쩌면 당연한 일. 85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도전을 시작해 두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88년 등정에 성공했다. 이어 92년까지 매년 시도마다 거듭 고배를 마신 그는 93년 가을 초오유(8201m)·시샤팡마(8027m) 연속 등정에 성공, 국제적인 산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그의 고봉 등정 질주는 계속돼 2000년 여름 K2(8611m)에 오름으로써 마침내 꿈에 그리던 14좌 완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시아! 에서는 최초이자 세계 여덟 번째였다. 하지만 히말라야를 향한 그의 열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성봉이지만 독립봉이나 마찬가지인 두 봉우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4년 칸첸중가(8586m)의 형제봉인 얄룽캉(8505m), 그리고 지난해 로체(8516m)의 형제봉인 로체샤르(8400m)마저 올랐다. 세계적으로 전대미문의 위업을 이룩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로체샤르의 경우 정상에 오른 시각이 오후 6시50분(내려올 것을 대비해 통상 정오쯤 정상에 오르는 게 정석이자 상식이다)인데다 등정 직후 설맹(雪盲)에 걸린 대원을 이끌고 하산에 성공한, 등반 사상 유례가 없는 초유의 ‘혈투’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트레킹의 최종 기착지인 팡보체 마을은 엄 대장이 마지막 올랐던 로체샤르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오른쪽엔 로체, 왼쪽엔 아마다블람(6812m)이 바로 지척인 양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로체 오른쪽 뒤편으론 에베레스트의 머리도 보인다. 그곳에서 엄 대장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1년6개월 전에 바로 저기를 올랐다. 올해로 16좌 완등의 서막을 올린 에베레스트 초등 후 20년이 흘렀다. 어떤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기적입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물질적·정신적으로 도와주신 수많은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말라야 신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해까지 모두 서른여덟 번 도전해 스무 번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오기가 대단하다.

“도전이니 오기니 하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8000m면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에요. 처음엔 그랬을지 모르지만 실패를 거듭 겪고 나서야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공이란 것도 결국 산이 받아줬기 때문이란 것을.”

-남들에게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강조하지 않나?

“산에 대한 예의가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도전이 없이 어찌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덤벼드는 걸 도전으로 생각해선 곤란합니다. 그건 무모함입니다. 철저한 준비와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리란 각오가 함께해야 진정한 도전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했어도 실패가 아니에요. 실패도 제대로 하면 성공의 씨앗입니다. 저도 16좌를 하기까지 열여덟 번의 실패를 했습니다. 안나푸르나는 다섯 번 만에, 로체샤르는 네 번 만에, 에베레스트·낭가파르바트·칸첸중가는 각각 세 번 만에, 그리고 시샤팡마도 두 번 만에 올랐습니다.”

-당신에게 산이란 어떤 존재인가?

“산은 제 인생의 큰 스승입니다. 산을 다니면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지혜와 인성, 내면적 의지 등을 모두 배웠으니까요. 자기 희생,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 항상 겸손할 것, 무리하지 말고 순리대로 할 것 등등. 제게 그나마 지금이 있는 건 산의 가르침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도자 같다.

“저뿐만 아니라 산을 오래 다니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마음을 하얗게 비워야 설산을 오를 수 있고, 또 설산을 오르다 보면 하얗게 됩니다. 오로지 정상이란 목표를 향한 일념뿐 추호의 잡생각이나 욕심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박에 사고로 이어지거든요.”

엄 대장은 16좌 완등을 이루기까지 히말라야에서 여느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별의별 극한 상황을 다 겪었다. 이승과 저승을 줄타기하며 세계 최고의 환희와 감동도 맛보았고, 대원과 셰르파 등 피붙이 같은 동료를 10명이나 잃으면서 죽음보다 진한 슬픔도 삼켜봤다. 인생을 떼고도 남음이 있다(목숨을 담보로 한 등반이니 사나이 인생을 쉰 살만 치더라도 50×38=1900살이다!). 그런 그가 이제 8000m 고봉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 땅에 희망을 히말라야만큼 쌓아가는 일이다.

“히말라야가 저를 온전히 돌려보냈을 땐 아직 시킬 일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요즘 정신이 없다. 하루에도 대여섯 건씩 밀려드는 강연 요청 때문이다. 전국의 각급 학교, 기업, 관공서, 군·경 등. 물리적으로 일주일에 고작 3~5번밖에 응할 수 없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혼을 쏟아낸다.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이들에겐 창조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각성시키고,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잠자고 있던 용기를 일깨워준다. 2000년 14좌 완등 이후 줄곧 해온 일이지만 8000m로부터 해방(?)된 올해부턴 정말 발 벗고 나선 일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네팔 등 오지에 학교와 의료·복지시설 지원은 물론 자신과 함께 등반을 하다 유명을 달리한 셰르파 및 동료 대원 유가족을 돕기 위해 5월 설립한 ‘엄홍길 휴먼재단’의 기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이번 트레킹 때도 팡보체 초등학교와 셰르파 유가족을 방문해 금일봉을 전달하고 격려했다. 1차로 5억원 정도가 확보되면 우선 팡보체 초교에 교실부터 짓는 등 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그는 네팔에서 ‘바라사부(최고의 스승)’로 불리는 유명 인사다.

이만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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