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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 예종 목숨마저 앗아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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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32면

즉위 두 달 후에 세조는 창덕궁에서 개국·정사·좌명·정난 4공신(四功臣)들과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정난 1등공신이자 병조판서인 이계전(李季甸)이 조용히 “오늘 성상께서 어온(御온:술)이 과하신 듯하오니 청컨대 대내(大內)로 돌아가소서”라고 권하자 세조는 대로해서 “내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인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면서 관(冠)을 벗게 하고 홍달손(洪達孫)에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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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전에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의 서리(署理)를 폐하지 말라고 했으니 너희들의 학술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고 꾸짖고는 신숙주를 시켜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좌익공신 높은 등급을 주려는데 너는 원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계전은 머리를 땅에 대고 사죄하면서 목 놓아 통곡했다. 세조는 상(床)에서 내려와 이계전과 신숙주를 잡고 술을 따라주고 춤추게 했는데, 『세조실록』은 ‘파할 무렵이 밤 2고(鼓:오후 9시~11시)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 연회 장면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명분은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權臣: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계전을 끌어내린 이유는 의정부 서리(署理)를 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라고 하는데,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에서 의정부에 먼저 보고하는 체제다.

반대로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의 권한이, 육조 직계제는 국왕의 권한이 강하게 돼 있었다. 개국 초의 의정부 서사제를 태종이 재위 14년(1414) 육조 직계제로 바꾸었는데, 세종이 재위 18년(1436) 다시 의정부 서사제로 바꾸었다. 피의 숙청으로 왕권에 대한 위협이 없었고, 영의정 황희(黃喜)가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를 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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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즉위 직후 의정부 서사제 폐지와 육조 직계제 부활을 명하자 병조판서 이계전과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 등이 반대했는데, 세조는 주창자인 하위지의 관을 벗기고 곤장을 친 다음 사형에 처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권력을 강화하고 싶은 것은 세조뿐만 아니라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태종과 달리 공신들도 우대하고 왕권도 강화하려는 모순된 길을 택했다.

정통성 문제를 안고 있던 세조는 끝내 공신들을 버릴 수 없었다. 세조는 공신들에게 정치적 특권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이득까지 나누어주었다. 공신전(功臣田)과 이른바 난신(亂臣)들의 처첩·노비와 전토를 준 것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보상이 대납권(代納權)이었다. 백성들에게 부과된 전세(田稅)와 공납(貢納)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代納)인데, 적은 경우가 두 배이고 서너 배로 걷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납을 방납(防納)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수령·아전과 짜고 백성들의 직접 세금 납부를 막기 때문이다. 현전하는 성종 때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대납자는 장형 80대와 도형 2년에 영구히 관리로 서용하지 않고, 대납을 허용한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율)로 논한다’고 대납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인 세조 7년(1461) 1월 호조는 “『경국대전』에 공물은 쌍방의 정원(情願)에 따라 대납하되 수령이 정한 값에 의하여 수급(收給)한다”고 조건부 허용임을 밝히고 있다. 백성들과 대납자 쌍방이 원하면 대납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원 세금보다 몇 배를 더 내는 대납을 원할 백성은 없었지만 공신·종친들의 경제적 이득을 보장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예종실록』 1년 1월자는 “처음에 세조께서 무릇 민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타인들이 경중(京中:서울)에서 선납하도록 허락하고, 그 값을 민간에서 두 배로 징수하였는데, 이것을 대납이라 한다”고 전한다.

같은 기록은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고 전한다. 대납제는 공신들에게 고을 전체 세금의 몇 배의 이익 착취를 법적으로 허용한 제도였다.

『세조실록』에는 대납의 고통에 대한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경국대전』대로 ‘백성의 정원(情願)에 따르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그 폐단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납 금지였으나 세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조 7년(1461) 3월 세조는 “근자에 효령(孝寧)대군과 충훈부(忠勳府:공신 관할 부서)에서 공물 대납 전에 그 값을 먼저 거두게 해 달라고 청했다”고 밝혔다. 세금을 선납하고 후에 거두는 대납도 백성들의 고통이 막심한데, 먼저 서너 배의 세금을 받아 그중 일부를 떼어 세금으로 내겠다는 후안무치의 청이었다.

세조는 쿠데타를 거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즉위했다면 성군(聖君)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성들의 수령 고소를 허용하고 자주 분대(分臺:사헌부 감찰)를 보내 수령의 탐학을 조사하게 한 것은 그의 애민(愛民)사상의 발로다. 그러나 그는 태생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재위 13년(1467)에 설치한 원상제(院相制)는 쿠데타 명분인 왕권 강화책마저 실패로 돌아갔음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백옹(白옹)·황철(黃哲)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집현전과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한 후 권한이 대폭 강화된 승정원에 실세 공신들이 출근해서 업무를 보았으니 왕권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세조가 원상제를 실시한 것은 공신들의 지지 없이 세자가 왕위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종 즉위 직후 원상은 앞의 세 명 외에 박원형(朴元亨)·최항(崔恒)·홍윤성(洪允成)·조석문(曺錫文)·김질(金질)·김국광(金國光) 등 9명으로 늘어난다.

세조는 또한 죽기 6개월 전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인사청탁)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에 설치한 것”이라며 분경을 허용했다.

사실상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세조에게 단종과 사육신 등은 영원한 콤플렉스였다. 세조는 재위 3년 조석문에게 내려주었던 단종의 후궁 권중비(權仲非)를 재위 10년(1464) 방면했다. 전 군주의 후궁을 신하의 노리개로 내려준 데 대한 뒤늦은 후회였을까? 한 해 전인 재위 9년(1463)에는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이른바 난신(亂臣)의 처첩과 딸들을 방면하고 다른 노비로 충당케 했다. 사망 넉 달 전인 1468년 5월에 세조는 술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가 잠저로부터 일어나 창업의 임금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형벌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한 가지 일이라도 원망을 취함이 없었겠느냐? 『주역(周易)』에 ‘소정(小貞)은 길(吉)하고 대정(大貞)은 흉(凶)하다’고 하였다.”

『주역』 둔괘(屯卦) 구오(九五)에 나오는 이 효사(爻辭)에 대해 왕필(王弼)은 『주역주(周易注)』에서 ‘직은 일에서는 곧으면 길하지만 큰일에는 곧아도 흉하다’고 설명했다. 별로 좋지 않은 효사로서 세조가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연려실기술』은 한명회에 대해 “만년에 권세가 떠나자 슬퍼하며 적막하게 탄식을 하곤 했다”고 전하고 있고 『해동악부(海東樂府)』는 신숙주에 대해 “59세로 임종할 때 한숨 쉬며, ‘인생이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고 마는가’라고 탄식했으니 후회하는 마음이 싹터서 그러하였다 한다”고 전한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은 즉위 직후 분경을 금지하고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宰樞:대신)를 막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한다”고 선포했다가 재위 1년 남짓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잘못된 쿠데타로 만든 그릇된 체제의 유산이 그 후계자에게 칼을 겨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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