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눈 높지 않다는 그녀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9호 15면

겨울이다. 플라타너스 잎마저 다 바닥에 흩뿌려진 낙엽의 막장 계절. 계절적 요인에 의한 심리적 허무와 공허가 극에 달한 탓인지 요즘 들어 ‘괜찮은 남자’ 좀 소개시켜 달라는 여인네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나쁘지 않은 커리어와 학벌, 그리고 길 위에서 마주쳤더라면 한 번쯤 고개 돌려 바라보게 될 정도의 미모를 갖춘 골드미스 혹은 예비 골드미스급 그녀들의 첫마디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사실 제가 별로 눈이 높은 편은 아니거든요.”

그렇다. 그녀들은 별로 눈이 높지 않다. 다만 키는 자기보다 조금 크면 되는데 ‘그래도 남자 키는 1m80cm 정도는 돼야겠죠’라고 덧붙이고, 학벌은 안 보지만 ‘그래도 SKY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느냐’며 또 덧붙인다. 외모도 ‘데리고 다니기에 안 창피할 정도면 돼요’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조인성같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조심스레 흘린다. 이건 겨우 소개팅에서 만나게 될 남자의 연봉을 두고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소개해 주는 입장에서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녀들의 첫마디에 나오는 남자(자기보다 키만 좀 크고 학벌·외모·직업 등은 아무래도 상관없는)라면 길거리에 차이고 밟힐 정도라서 왜 그네들이 여태 연애를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갈 뿐이다. 하지만 뒤따라 나온 ‘진심 어린’ 조건들을 따져 보자면 미안하지만, 그런 남자가 있으면 차라리 내가 게이로 전향하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언제부턴가 여성은 매너와 신사다움을 괜찮은 남자의 미덕으로 손꼽으면서 동시에 ‘이 시대에는 야성미를 갖춘 사내다운 사내가 없다’며 한탄한다. 하지만 이건 남자들이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혹은 ‘엄마 같으면서도 요부 같은 여자’를 원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정신분열이다.

이제야 그녀들은 뉴욕의 네 여인네가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 간 거야?”라고 울부짖었던 것처럼 ‘글로벌 남자 위기’에 새삼 공감하는 것 같다. 간혹 괜찮은 남자는 자신들이 커리어를 쌓는 동안 영악한 어린 것들이 다 채어 갔다며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곤 ‘A급 미스’들은 ‘F급 미스터’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며 현실을 개탄한다.

물론 일정 부분 일리는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미안하게도 유사 이래로 그녀들의 높지 않은(?) 눈높이로 봐서 ‘괜찮은 남자’은 원래 희귀했다. 아마도 BC 10000 시대에는 어차피 젠틀한 남자는 그 종자가 없었을 테고, 오늘날에도 아르마니를 입고도 야성적일 수 있는 건 ‘배트맨’ 브루스 웨인 정도다. 결국 그녀들은 밤낮으로 불가능한 수퍼 히어로 꿈만 꾸고 있는 게다.


중앙m&b ‘SURE’ 잡지기자인 박정선씨는 드세고 기센 여기자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버텨온 남자로 ‘퍼펙트 맨’을 바라는 수많은 그녀들에게 “그러려면 퍼펙트 우먼이 먼저 돼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