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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짚기>신비의 천연도료 옻칠이 돌아온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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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현대화의 그늘에 묻혀온 옻칠은 우리 민족 전통공예의 정수였다.오늘,찬란한 옻칠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산업화'를 무기로 한국 옻칠의.세계화'를 향한 새로운 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등신불(等身佛)은 불심깊은 스님이 열반(涅槃)후 그대로 불상이된 것을 말한다.중국 선불교의 전통인 이 성불(成佛)의식에서 육신에 영원히 입혀드리는 옷이 바로 .옻'이다.
입적 이후 4~5년간 항아리에 모신 고승의 몸에 금물을 씌우기에 앞서 옻칠을 하는 것이다.
옻이 부패방지와 항균효과에 뛰어난 효과가 있음은 팔만대장경에서도 알 수 있다.7백여년의 세월동안 대장경의 표면이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이 옻칠 덕택이라는 사실은 칠이 벗겨진 부분만 유독 훼손이 심했던 점에서 확인된다.
기원전부터 사용돼온 이 신비의 도료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나전(螺鈿.자개)과 검붉은 색의 옻칠이 조화를 이루는 나전칠기 자개장.화장대등은 중산층 가정의 주요 재산목록이었다.
하지만 값이 10분의1에도 못미치는 유사 화학도료 .캐슈'가보급되면서 옻칠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로 인한 서양식 가구의 유행도 옻칠의 쇠퇴를 가속시켰다.결국 90년대 들어 옻칠 가구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한때 5만명이 넘었던 나전칠기 기능인 수도 이젠 5천명이 채 안된다.그나마 대부분 캐슈제품으로 생 계를 유지하고 있다.간혹 들어오는 옻 주문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서울시 주최.96우수문화상품전'에서 칠기공예품으로 대상을 받은 김차봉(58)씨의 회고.“해방 직후 15세의 나이로 옻이 올라 온몸이 짓물러터지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장인(匠人)의 꿈을 안고 옻칠을 배웠습니다.하지만 이젠 배우러 오는 후배가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밥벌이조차 힘들어진 마당에 옻오름의 시련을 감수하면서 기능을 전수하겠다는 젊은이를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현재 일하고 있는 기능인중 가장 젊은 사람이 40대니 맥이 끊어질 위기라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옻칠의 옛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작업이 시작됐다.단순히.잊혀져가는 옛것'을 계승.복원시키려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화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차원이어서 의미는 더하다. 통상산업부는 지난해 4월 옻칠 제품을 전통고유기술 개발사업추진과제로 선정하고 집중 육성키로 했다.
옻칠공예의 산업화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의 경우 지금도 옻공예품의 인기는 대단해 시장규모만 해도 연간 5천억원대를 넘어선다.
일본이라고 해서 캐슈가 없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전통적으로 옻칠한 나무식기를 사용해온 일본인들은 음식을 담는 그릇만큼은 옻제품을 고집한다.
이들은 나무그릇뿐 아니라 유리.도자기등에도 옻칠을 입히기 시작했고 심지어 공중전화부스와 변기등에까지 종종 옻칠을 할 정도다. .옻칠'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japan'이라는 것에서도 일본인들의 옻칠애착 역사를 엿볼 수 있다.도자기가 영어로.china'인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
하지만 기술만큼은 한국의 기능인들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부산여대 산업공예학과 권상오(48)교수는“일본에서 열리는 국제칠기공예전에서 여러차례 우승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옻칠기술은 뛰어나다”며“특히 자개를 새겨넣는 나전칠기에 있어서는 독보적”이라고 진단한다.
지금이라도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옻제품을 개발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격 측면에서도 일본의 3분의1 정도로 공급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옻칠공예 산업화'추진의 가시적인 움직임이 현재 한국전통고유기술산업진흥협회(회장 하종철)가 추진중인 전통공예촌 건립사업이다.
경기도 포천이나 남양주에 98년까지 약 50만평 규모의 전통공예기능인 집단 거주지역을 조성,식기등 생활용품의 양산체제를 갖추고 이곳을 터전삼아 옻칠산업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진다면 주거공간에서 밀려났던 옻칠제품들이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와 특유의 신비를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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