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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개인안보’에 눈을 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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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6년 9월 10일, 경기도 시흥시 다세대주택 3층에 살던 S씨에게 직장 동료 남성(28세)이 찾아왔다. 이 남자는 헤어진 뒤에도 S씨를 끈질기게 스토킹하다 사건 며칠 전 경찰지구대에 체포되기도 했다. 만나자는 요구를 재차 거절하자 남자는 S씨를 마구 때리며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전화로 S씨의 비명을 들은 직장 선배 여성(35세)과 이웃 목격자가 112에 신고했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은 가족의 요청이 있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다며 망설였고, 다세대주택 관리인도 “수색영장이 없으면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경찰은 출동 한 시간 만에 철수해버렸다. 그 사이 S씨는 성폭행당한 뒤 흉기로 여러 차례 찔려 살해됐다. 서울고법은 “경찰관이 강제 진입으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경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며 “국가는 유족들에게 2600만원을 주라”고 판결했다.

 S씨의 비극에 대해 경찰 측은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남의 집에 들어가려면 ‘부득이하다고 인정할 때’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필요한 한도 내에서’라는 긴 전제조건이 붙는다는 사실(경찰관직무집행법 7조)을 강조하며 나름의 어려움을 하소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다. S씨는 단순히 살인범만이 아닌 국가기관에 의한 피해자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취약한 ‘개인안보(personal security)’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개인안보는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분류한 일곱 종류 ‘인간안보(human security)’ 중 하나로 ‘국가나 단체, 개인이 가하는 물리적 위협·폭력으로부터의 안전’을 뜻한다.

‘안보’라고 하면 과거에는 무언가 엄청나고 수상스러운, 그러면서도 왠지 겁나고 등에서 식은땀 나게 만드는 단어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총력안보’는 ‘자주국방’ ‘철통보안’ 같은 말과 잘 어울렸고, 가끔 지하실이나 ‘붉은 방’으로 통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사람을 한편으로 경건하게, 한편으로는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개인안보라니.

UNDP가 인간안보 개념을 정리한 데는 90년대 들어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전통적인 국가 중심의 안보 개념이 흔들렸다는 배경이 깔려 있다. 군사력 중심이던 전통적인 국가안보의 대체 또는 보완 개념으로 사람 개개인을 중시하고 지키자는 인간안보가 떠오른 것이다. UNDP는 개인안보 외에 ‘경제안보’ ‘식량안보’ ‘건강안보’ ‘환경안보’ ‘공동체 안보’ ‘정치적 안보’를 인간안보 개념으로 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부터 몇 차례 인간안보를 언급했지만 아직은 외교정책 차원에 머무르는 듯하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집단화·진영화돼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개인안보에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정부·공공기관, 여야정당, 비대해진 시민단체들…. 온통 ‘센 놈’ 뿐이다. 대부분 당파성에 매몰돼 있다. 처음엔 ‘소중한 개인 하나 하나’를 위해 출범했을 단체들이 지금은 본말이 바뀌어 개인을 찬밥 대하듯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어느 한편에 서야 반쪽 지지라도 얻는다. 촛불시위 와중에 억울하게 승용차 유리창이 박살 난 시민이나 장사를 망친 상인은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다. 국가인권위조차 센 놈 중 한쪽 손을 들어주기 바쁘지 개인안보는 안중에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의 ‘고래’들 때문에 정작 가장 소중한 개인은 등이 터지고 있다. 안보가 별건가. 온갖 종류의 안보가 있지만 개인안보를 외면해선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개인들 아닌가.

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