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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을/학원] 선생님, 새엄마가 되어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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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사실은… 하니가 자기 엄마가 싫다면서 선생님에게 새엄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네요.” 차마 어떻게 이런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입은 떨어지지 않고 얼굴은 숯덩이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고 몸은 배배 꼬였다. 이런 나를 답답하다는 듯이 보던 딸아이가 거리낌없이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우리 아빠 잘생겼지요. 그리고 힘도 세고 성격도 괜찮아요. 저도 착한 딸이 될 테니 우리 새엄마가 되어 주세요”하며 두 손을 모으는 거다.

나는 딸아이를 바라봤다. 철없는 아이로만 보았는데 여자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양면성을 엿본 기분이었다. 미술학원 선생님은 왜 딸아이가 그런 소리를 하게 됐는지 끝까지 다 들어주셨다. 그동안 나는 눈을 어디로 둘지 몰라 아그리파 석고상을 훑어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곧 아이의 눈높이로 교통정리를 해줬다.

“그래, 그래. 선생님이라도 그러면 화가 났을 거야. 그런데 하니야, 하니가 만일 엄마라면 하니 같이 자기 생각만 하고 엄마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딸을 보면 기분이 어떨까? 하니는 먼저 아빠한테 엄마랑 헤어지고 싶으냐고 분명히 물어봤니? 그리고 난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단다.”

딸아이와 미술학원을 나오는데 겨울밤의 매서운 한기가 중심 없는 남자의 가슴을 스쳐갔다. 배가 고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근처 호떡집에 들어갔다. 둘이서 호떡 다섯 개, 오뎅 네 개를 먹고 나니 배가 불러왔다.

“아빠, 이거 몇 개 싸가요. 엄마가 호떡 좋아하시잖아요”

“내 딸이 이제야 엄마 생각을 다하다니 철이 들었네. 이렇게 귀여운 딸을 아까워 누구에게 시집 보내지. 하니야, 너는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가끔 억지를 부리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지 솔직히 말해봐.”

“그건 말이야, 나도 사실은 엄마가 나를 예뻐하는 건 알지만 웅이랑 똑같이 잘못해도 누나라고 나만 혼내고 양보하라고 하잖아. 그래서 내가 심술이 나서 더 못되게 구는 거야.”

아이와 같이 손잡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는 “당신은 예쁘고 마음 착한 여자랑 같이 살지 왜 들어온 거야”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나는 재빨리 딸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엄마 아까는 제가 잘못했어요. 같이 잘못했는데도 엄마가 웅이 편만 드는 것 같아 제가 괜히 심술을 부렸어요. 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좋아요. 엄마 이 호떡 드세요. 헤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 우크라이나 벌판에서 소피아 로렌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유천석 (46·광명시 소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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