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업계 이번엔 ‘환변동 보험’ 폭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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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1일부터 직원들을 모두 유급휴가 보내기로 했어요.”

업소용 냉장고를 만드는 S사의 이모(58) 대표는 14일 부품용 모터만 가득 쌓인 공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경북 경주시에 있는 이 회사는 이미 이달 초 직원 30명 중 12명을 내보냈다. 일거리가 거의 없어 공장을 쉬어야 할 지경이다. 이 대표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일본 대기업 브랜드를 달고 미국에 수출해 오던 중소기업이다. 2005년 수출을 시작해 지난해 22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규모는 작지만 기술력을 인정받아 연초만 해도 올해 30억원의 매출을 기대했다.


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반드시 환율이 내려갈 거다. 환율 하락 위험에 대비해 환헤지(위험회피)를 해야 한다’는 수출보험공사와 일부 경제단체의 전망을 믿고 환변동 보험에 가입했다. 당시 원-달러 환율 1030원을 기준으로 해 한 달에 12만 달러씩, 1년 만기 보험에 들었다. 기준보다 환율이 떨어지면 기업이 보상을 받지만, 환율이 오르면 반대로 환수금을 수출보험공사에 물어주는 계약조건이었다. 그런데 환율은 내려갈 줄 모르고 9월부터 가파르게 치솟았다. 환율이 오르면서 이 회사가 내야 할 환수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공교롭게 수출 물량마저 급감했다. 연간 3000대를 계약한 일본의 거래업체가 9월 이 사업을 포기했다. 금융위기로 어려워진 미국 바이어가 일본 브랜드 제품 대신 중국·인도·베트남의 좀 더 값싼 제품으로 발을 돌린 것이다. 이 대표는 “품질이 문제라면 우리가 책임져야겠지만 미 경기 침체의 불똥이 튀면서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당했다”며 허탈해했다. 이달 들어 수주 물량은 겨우 24대로 평소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대표는 12일 수출보험공사로부터 ‘10월분 환수금 3820만원을 기한 내 납부하지 않으면 연체이자를 매기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지난달 말 ‘두 달치(8, 9월) 환수금 3000만원을 내지 않으면 금융거래를 제한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받은 데 이어 두 번째 경고장이다. 그가 한 달에 100만원짜리 냉장고 20대를 팔면 부품값 등을 빼고 실제 손에 쥐는 건 300만원 남짓.

“수출만 좀 되면 환수금을 내고도 버티겠는데…. 이러다간 부도를 내는 건 시간문제예요.”

이 회사처럼 환변동 보험에 가입한 국내 수출기업은 1200여 곳이다. 수출보험공사에 따르면 9월까지 발생한 환수금은 총 6449억원에 달한다. 연말까지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유지한다고 치면 10~12월 석 달 동안만 6187억원의 환수금이 더 발생한다. 환변동 보험에 들었다가 수출보험공사에 물어내야 할 환수금이 올해 1조2636억원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14일 현재 원-달러 환율은 1399원이다.

수출보험공사 역시 예상치 못한 환율 급등으로 중소기업이 과중한 부담을 안게 돼 난처한 표정이다. 공사 관계자는 “최장 3년까지 환수금을 나눠 내도록 납부 기한을 연장했다. 은행의 저리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는 일도 한다. 기업 부담을 덜기 위한 노력을 강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업들이 요구하듯 환변동 보험을 만기 전에 해약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미 공사가 은행에 환수금을 납부한 상태라, 계약을 해지하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금이 구멍난다”는 것이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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