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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보는 악보 … 연주는 멈출 수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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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시력을 잃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씨. 앞이 점점 보이지 않지만 그는 무료 음악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한다. [사진작가 성혁진 제공]

11일 오후 8시 서울 삼성동 ‘포니 정’ 홀. 100석 남짓한 작은 홀 무대에 바이올린 연주자 김종훈(39)씨가 올라왔다. 반주자인 피아니스트 채은경(39)씨의 팔을 잡고 채씨가 이끄는 대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선천성 녹내장이다.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시야는 좁아지고 있다.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남녀 구분도 하지 못한다. 움직임을 알아채는 것도 어렵다.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맹(全盲) 상태가 된다.

김씨가 바이올린을 턱에 괴었다. 바이올린 소나타 6번이 흘러나왔다. 1802년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빈 외곽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작곡한 곡이다. 대담하고 힘 있는 소리였다.

◆주먹만 한 음표=“혼자 걸어 나오다 무대에서 떨어지는 일은 예사였어요. 평소 자존심 때문에 지팡이를 안 가지고 다녀 공사장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하고, 개천에 빠지기도 했죠.” 무대 뒤에서 만난 김씨는 쾌활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첫 악보는 달력 뒷장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이 나빴던 그가 초등학교 특별활동부에서 바이올린을 선택했을 때 어머니는 달력 한 장을 뜯어 뒷면에 오선지를 그렸다. 음표 하나가 주먹만 했다. 도수 높은 안경 때문에 ‘돋보기’라고 놀리며 따돌리던 친구들 대신 라디오, 카세트테이프가 그의 친구였다. “음악을 들을 때만큼은 세상에서 밀려나지 않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연주 모습을 보지 못해 좋은 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활을 바로 쥐고 정확한 부분을 누르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모습을 확대경을 들고 봐 가면서 자세를 익혔다.

경쟁률 높은 부산음악콩쿠르에 18세이던 김씨가 출전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장애와 상관없이 1위를 차지했다. 이후 한양대 입시에서도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경쟁해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동아음악콩쿠르에서 3위에 올랐다. “레스토랑, 밤무대를 가리지 않고 연주해 가며 모은 돈으로 공부했어요.”

물론 쉽지는 않았다. 포기도 있었다. “대학 시절, 두려웠어요. 언젠가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는 싸워도 이길 수 없었어요.” 5층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나무에 걸려 뼈 몇 개만 부러졌다.

“살아났던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시 생각하고 악기를 들었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손으로 기억하는 아들의 얼굴=김씨는 “이제 암흑은 준비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집에서 걸어 다니면서도 여기저기 머리를 부딪혀요. 쿵쿵 부딪히면서, 이제 정말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큰 공포는 아이들의 얼굴을 잊는 것이다. “음악은 수천 곡이 머릿속에 있어요. 악보는 못 보더라도 태욱(8)·태완(3)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요. 얼굴보다 표정이 궁금해서 못살겠어요.”

두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쥐어주며 그는 아이들의 뼈마디 하나하나를 만져본다. 그렇게 자세를 잡아주며, 그렇게 그는 몸으로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독일 한스아이슬러 음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난 아내 김영아(33)씨의 표정 또한 그의 기억 속에만 있다.

김씨는 이달 4일부터 25일까지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열고 있다. 하루 두 곡 또는 세 곡씩 나눠 총 10곡을 연주 중이다. 베토벤 소나타는 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악보다. 이제는 특수 기계로 확대한 악보조차 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은 새로운 도전이다. “점자 악보로 새로운 곡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청중은 보이지 않지만 연주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김호정 기자, 사진=사진작가 성혁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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