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년發 새벽열차에 몸을 싣고-덜컹거리는 어둠을 뚫고 새해아침을 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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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철길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길게 휘어진 철길.긴 밤을 달려온 기관차 불빛은 새벽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길은 멀다.혼자 나선 밤기차 여행. 지나간 시간은 아름다웠다. 혹은 웃음으로, 혹은 한숨으로 어떻게든 헤쳐나와 만난 새로운 새벽.쓰고 단 지난 기억들을 호명해 하나씩 배웅하고,그들을 보낸 빈 자리에서는 새로 온 한 해와 인사하고 싶었다.

눈 덮인 월출산이라도 좋다.남해 금산 중턱에 앉아 금빛 바다를 바라봐도 행복하다.혹 작은 배를 타고 겨울 바다를 건너면 고하도,목포 앞바다 그 여린 섬에 갈 수도 있다.

낡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밤기차에 올랐다.배웅과 마중의 터를 찾아 가는 길. 어쩌면 아픈 반성과 다짐이 있을 먼 길에 함께 할 이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쯤, 아니 둘쯤 동행하는 이가 있다해도 나쁠 것은 없다.

떠나는 이들이 제자리를 잡아 보내는 이들이 창밖에서 손을 흔들자 기차는 느릿느릿 승강장을 나서고 모두들 그제서야 안심한 얼굴로 낡았지만 편안한 의자 속에 몸을 묻었다.

잘 닦인 도로를 자동차로 달릴 수도 있다. 화려한 휴양지를 찾아 비행기를 타도 괜찮다.하지만 기차로 간다. 느리고 덜컹거리는 기차로 떠난다. 기차라도 밤을 달려 아침에 닿는 완행기차다. <관계기사 45면>

유리창에 서린 김을 외투 소매로 닦아내고 겨울밤 저 먼 곳,희미한 불빛 두 개 깜박거리는 들판을 바라본다.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가시처럼,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기형도 시 ‘조치원’중에서)

그리고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어내고,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한다.

혹은 위선으로, 어쩌면 아집으로 옳지 않음을 알면서 그냥 넘긴 일도 있었다.때론 게으름으로, 때론 비겁함으로 마땅히 나서야 할 일에 몸을 숨긴 적도 많았다.

레일의 마디에 걸려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지난 시간이 남긴 아쉬움과 함께 새해의 기대가 몸을 흔든다.그 위선과 아집을,이 게으름과 비겁함을 기차가 아침에 닿으면 버려야 할 일은 아닌지.

‘세상은 온통

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

밤차를 탄다

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

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

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

귓가에 걷히면서

작고 낮은 참 목소리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다’

-신경림 시 ‘밤차’중에서

언제였던가.새해를 기다리던 그날,우리는 아직 젊었다.‘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김광규 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중에서).

세월은 흐른다.잊고 있어도 세월은 흐른다. 이 새로운 해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만날 것이다.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묻고,‘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이다.

언제든 누구든 열정과 분노만으로는 살 수 없다.현실에 충실한 이들의 삶은 칭찬받는다.하지만 열정과 분노를 영영 잃고,현실을 넘어서려 했던 기억마저 잊고 산다면 그것들 대신 다른 무엇을 더해야 우리들 삶에 행복이라 이름붙여 정말 아름다울 수 있을까.

기차는 계속 달린다.간혹 기차가 멈춰서는 곳은 여전히 낯선 이름의 작은 역들.몇몇은 타고 몇몇은 내린다.몇 번이고 닦아낸 유리창 위로는 방울방울 맺힌 물들이 흘러내린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어떤 눈은 차가운 철길에 부딪쳐 사라져 가고,어떤 눈은 저 멀리 산봉우리에 내려 다른 눈들 위에 쌓이고 있다.

기차가 계속 달려 밝은 아침에 닿으면,눈은 그치고 유난히 붉은 새 해가 떠오를 것이다.종착역 승강장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고,붉은 해가 그 위로 새 빛을 뿌리면 우리는 그 위를 한발 한발 걸어갈 것이다. 몇인분의 희망과 몇인분의 사랑, 그리고 정확히 그만큼의 꿈을 싣고 하얀 벌판 위로 눈 사이를 헤치며 기차는 새벽 속으로 달리고 있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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