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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시 가작-가족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발가락이 가려웠다.노을 밑으로 낙엽들이 서둘러 떨어질 때,국문학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들이 허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밟아보았다. 길은 덜 자란 마늘밭 하나 건너지 못하고 내려갔고,그날밤 법성포로 떠난 아버지의 굵은 손끝에 매달린 굴비 한두름 짜게 절여 두겠지,밥그릇 속에 들어가 있는 쉰 밥풀같은 하루,밑으로 가볍게 뿌리를 내리고 여기저기 유채꽃으로 찾아오는 봄.
풀어지겠지,개울에 갇힌 은어 몇 마리쯤.
언덕부터 고추꽃들이 매운 바람으로 불고,아직 덜 꺼낸 유품같은 우물을 팠다.그날 돌아가신 할머니 팔까지 올라오던 물결,씻고 헹구는 나의 발자국 멀리 흘러갔다.
자취방은 어머니 근심이 기어나오던 그날같은 배고픔.
신문배달을 했다.셔터 밑으로 자꾸만 쑤셔넣던 체첸 반군들.
군에 입대한 형으로부터 엽서가 오고 가지런히 기댄 등교길이 즐거웠다.
일몰은 눈 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애들은 하나씩의 풍경들을 들고 들어가 꿈을 만들고,껌 씹는 낙엽을 밟으며 술집 누이가 들어왔다.그날 밤, 기도의 형식으로 버려진 수난들이 일기장 속에접혀 들어갔고, 이유를 몰랐다.
신발을 신지 않은 개들이 고향을 향해 떳떳하게 짖어대고 기쁜꽃들로 나가 계절을 바꿀 수 있는 이유를.
세월은 넘지 못하는 것일까.누이의 이마 하나, 바라보며 잠이들었다.
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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