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결산>사회-역사청산 진통속 명예퇴직 찬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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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는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같은 메가톤급 대형 사고보다 잔잔한 변화의 미풍이 불었던 한해였다.명예퇴직 바람등 우울한 변화가 있었던 반면 구속요건 강화등 국민 권익을 향상시키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명예퇴직 바람은.고개숙인 남자'들을 양산해냈다.때이른 추위처럼 40,50대 중년층의 마음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명예퇴직 바람은.조기젓'(조기퇴직)과.명태젓'(명예퇴직)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유행어를 낳았고.아버지'라는 소설을 일약 베스트셀러 대열로 끌어올렸다.
인신구속 관행이 달라지게 된 것도 올해 큰 변화중의 하나다.
법원이 개정 형사소송법에 맞춰 불구속 재판을 확대하기로 하고 검찰도 실형선고가 예상되는 피의자에 대해서만 구속영장을 청구키로 하는등 무분별한 구속관행이 개선될 수 있는 계 기가 만들어졌다. 특별한 사건.사고가 없었던 올해는 이래 저래 법원이 중심 무대였다..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1년내내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3월11일 1심 첫 공판으로 시작된 全.盧재판은 8 월말 1심 선고와 지난 16일 항소심 선고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한곳에 모았다.11월14일에는 비록 증인선서와 증언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최규하(崔圭夏)전대통령이 강제 구인됐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도 법앞에 평등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칙이실제로 적용됐다는 점에서 국민의 법의식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학가는 한총련 연세대 사태가 전환점이었다.대학생 5천5백48명이 연행되고 4백44명이 구속기소되는 최대 규모였다.사태가마무리된 뒤 화염병에 그을리고 쇠파이프에 부서진 연세대 종합관에서 대학가는 변화의 바람을 느꼈다.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후보들의 퇴조가 두드러진 반면 비운동권 후보들의 약진이 이어졌다. 전국 1백77개 4년제 대학중 1백56개 대학이 선거를 치러 비운동권 후보가 38%를 차지,지난해 33%보다 약진세를보였다.특히 한총련을 이끌고 있는 민족해방(NL)계열 후보의 탈락이 돋보여 지난해 전체 대학 총학생회장의 53% 를 차지하던 것이 올해는 47%로 줄었다.
TV드라마.애인'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생긴 .애인 신드롬'은 올해 중반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들었다.가족.사생활.불륜등의 문제를 제기했고 주인공들의 행동을 놓고 사무실.시장.술집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급기야 국회에서까지 불륜을 조장하는 TV드라마 제작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애인 하나 없는 기혼자들이 신종 팔불출로 여겨지기도 했고 드라마속 남녀 주인공이 착용한 옷과 액세서리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애인신드롬이 번지면서 불륜.탈선이 새로운 관심거리로 떠올랐다.더구나 7월 중순 주부 윤락이 경찰에 적발되면서 불륜.탈선의수은주는 한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겁게 올라갔다.공무원과 대기업 간부등을 남편으로 둔 중산층 주부들이 무료함과 생활비 보충을 위해 윤락행위를 벌였다는 사실이 충격을 더했다.
이미 적정수위를 넘어선 10대 성문제는 6월27일 서울에서,7월15일에는 충북 청원에서 각각 여중생이 아기를 낳는 사건이발생,충격과 함께 체계적인 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다.
한약 조제권을 둘러싸고 지난해부터 한의학계와 약학계가 벌여온한.약분쟁은 올해도 1년내내 계속됐다.보건복지부장관 자문기구로설립된 한의약발전위원회에 대한 한의학계의 불만이 불거져 나오는것을 시작으로 한의대생들의 봄학기 등록 거부 ,한약조제시험 파동,약대생들의 수업거부,한방병원 수련의들의 단식농성,한의대생들의 가을 학기 등록거부및 제적.구제등 잠시도 쉬지않고 한해를 농성과 분쟁으로 일관했다.
변화의 바람이 느껴지지 않은 곳도 있었다.유해식품 논쟁은 올해도 계속됐다.시판 분유와 우유에서 암과 불임을 유발하는 독성물질이 검출됐다는 식품의약품안전본부의 발표는 곧바로 충격과 혼란으로 이어졌다.이후 인체에는 해가 없다는 복지부 발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고 제보 공무원이 구속되는가 하면 보도한 기자가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또 올초에는 중국음식 요리에 주로 쓰이는 돼지기름 쇼트닝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복지부 발표로 인해 중국집 손님이 뚝 끊기는등 한차례 소동이 일기도 했다.
공직자 비리도 여전했다.이양호(李養鎬)전국방장관이 수뢰등 혐의로 구속돼 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서울시 고위 간부들이 버스노선 조정등 과정에서 버스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기도 했다.

<이창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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