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길목이것이궁금하다>대선후보결정시기-후보결정 과거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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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고권력자의 차기대선후보 지명은 5공말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노태우(盧泰愚)낙점에서부터 비롯됐다.
후보결정은 곧 권력이양을 의미하기 때문에 후보가시화의 시점도권력누수를 최대로 막은 대선연도 중반에나 가능했다.
全대통령은 노신영(盧信永)총리와 장세동(張世東)안기부장을 임기후반까지 후계군의 염두에 두었다는게 통설.
86년 盧총리시절 그를 총애한 全대통령이 총리공관을 자주 찾자.민간인대통령'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후계자를 꿈꾸던 노태우(盧泰愚)씨는 소심한 성격탓에 당시 한강에 나가 멍하니 강물을 보고 집에서 만화책을 읽기도 했다고 당시 측근들은 기억한다.
全대통령은 그러나 87년1월 박종철(朴鍾哲)군 치사사건이후 정호용(鄭鎬溶).이춘구(李春九)씨등 군(軍)출신들의.盧統만들기'가 시작되고.퇴임후 안위'라는데 직면하자.평생후계자'였던 노태우씨외의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해 6월2일 청와대 상춘재의 당 중앙집행위원 만찬에서 全대통령은 盧민정당대표가 후계자임을 확인했고 6.10전당대회에서 盧대표는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반면 노태우대통령은 임기 마지막까지 김영삼(金泳三)민자당대표지명의사를 명백히 밝히지 않았다.
金대통령은“노태우씨는 끝까지 내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며 盧대통령의 92년9월 탈당과 중립내각구성을 예로 들기도 했다.낙점이 아니라.쟁취의 결과'라는 얘기다.
盧대통령의 불분명한 태도 때문에 당시 박태준(朴泰俊)최고위원을 비롯,여러명이 盧씨의 의중이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결국 이종찬(李鍾贊)의원이 불공정 경선을 명분으로 참석을 거부한채 치러진 92년 5.19경선에서 金대표는 64.2%의 지지로 후보자리를 따냈다.
야당의 경우 71년 YS.DJ가 맞붙었던 후보경선등을 제외하면 최근에는 김대중(金大中).이기택(李基澤)공동대표의 민주당경선(92년)에서 보듯 대개 1인정당의 들러리 행사에 불과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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