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학계 “우린 제대로 공부 안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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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예정보다 30분을 넘겨서도 토론회는 시작되지 못했다. 200석이 넘는 회의장엔 40명 남짓만이 앉아 있었다. 토론의 발표문을 집필한 한 교수는 ‘급한 일’로 일본 출장을 갔다고 한다. 토론 패널 중 몇몇은 아직 회의장을 찾지 못했다. 단상에 마련된 6명의 자리엔 공동 발표자 1명만이 앉았다.

1988년 11월 학술단체협의회 창립대회 모습. [중앙포토]


8일 오후 2시30분, 건국대 법대 국제회의장의 모습이다. 이틀간 열린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 창립 20주년 기념 연합 심포지엄을 마무리 짓는 ‘종합 토론회’ 자리였다. 학단협은 1988년 출범한 진보적 학술운동 단체들의 연합체다. 이날은 ‘학술운동 20년, 그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를 놓고 진보진영의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벌이기로 한 자리였다.

발표에 나선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20년 전의 이야기로 말문을 뗐다. “진보적 학술운동이 20년을 맞았다. 20년 전 행사 땐 10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다. 심포지엄 자료집을 500부 밖에 마련하지 못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민주화 20년’, ‘좌파 정권 10년’ 뒤에 맞은 진보 학계의 성년식치고는 단상과 객석이 싸늘했다. 토론회 뒤엔 진보 학계의 ‘대부’로 평가되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그는 “40년 간의 민주화 투쟁의 열매를 난데 없이 지난날의 극우세력들이 갈취한 상황”이라고 현 시국을 진단했다. 그의 강연에도 청중은 70명을 넘지 못했다.


◆‘대안의 부재’ 학계의 자성=정해구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에 따라 진보 진영이 정치 권력을 넘겨준 듯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진보 학계의 대안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노무현 정부 출범 때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지난 정부가 정치적으로는 진보를 표방하는 듯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기울게 된 것은 원래 성격이 그랬다기보다 진보 학계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극화 심화 ▶실업 문제 ▶비정규직 양산 등 사회경제적 문제에 진보 학계가 현실적 대안을 제시할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진보적 학술운동 단체에서 토론을 할 때 경제학자를 찾기 어렵다”는 말로 ‘대안 부재’의 현실을 토로했다. 최근의 전세계적 금융위기 사태를 맞아 진보 학계에서 제대로 된 분석과 미래 전망을 내놓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토론에 나선 이세영 한신대 교수도 “진보 학계가 막상 정권에 들어가보니 뭘 해야 할지 준비된 것이 없었다. 독재와 싸우다보니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스로를 ‘권력 대상’으로 성찰해야=이날 토론에선 진보학계의 ‘제도권 단체화’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학단협 출범 당시의 소장파 학자들이 대학에 자리 잡으면서 학계의 또다른 ‘권력’이 됐다는 자성이다. 대학의 비정규직 강사들의 처우 개선에 진보학계가 기여한 바가 무엇이냐는 질타도 나왔다.

외부의 정치·경제 권력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진보학계 스스로가 자신을 ‘권력대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학계가 교수 채용이나 평가의 근거가 되는 학술지 위주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학문이 국가권력에 종속되고 진보 학계도 이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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