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교과서 바로잡고 검정제도 재정비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좌편향 논란을 빚은 대목을 중심으로 수정 권고안을 내놓자 일부 교과서 집필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권고안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큰 요인 중 하나는 교과부의 눈치보기식 검인정 제도 운영이다. 그 결과 일부 역사학 단체와 필자로부터 “검정 제도의 훼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교과부가 근현대사 교육을 강화하겠다며 전국 고교에 배포한 근현대사 교수·학습 자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렸다는 반발을 부른 게 3년 전이다. 그럼에도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허겁지겁 고치겠다고 나섰으니 영혼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번 권고안도 정작 핵심은 에두르면서 ‘공출’을 ‘미곡 수집’으로, ‘결국’을 ‘이후’로 바꾸는 등 변죽만 울리는 데 그쳤다.

교과부 장관에게 교과용 도서의 내용 수정을 명할 권한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집필진이 먼저 수정에 나서야 한다. 좌편향에서 우편향으로 이동하라는 말도, 정권이 바뀌었으니 새 정권 입맛에 맞추라는 주장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뉴라이트 단체가 펴낸 대안교과서가 독재를 합리화하는 등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몇몇 필자는 검정 제도의 취지라며 서술의 다양성을 방패로 내세우지만, 교과서는 개인 논문이나 세미나 발표문이 아니다. 자라는 학생들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책이다. 특정 이념이 아닌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생각, ‘상식’을 반영해야 한다.

절차상의 약점으로 본질을 가려선 안 된다. 한국전쟁을 민족적 관점에서만 보고 자유민주주의 수호 측면을 도외시한다든지, 한국의 달동네와 도시 빈민층, 광주대단지 사건은 상세히 소개하면서 북한의 강제수용소나 인권탄압을 언급하지 않는 게 균형 잡힌 서술인가. 한국전쟁 당시 학살에 대해 북한군이 ‘북한식 개혁을 하면서 지주나 공무원 등에 대한 숙청을 감행’했다고 서술하고, 보도연맹·거창학살·노근리 사건을 앞세운 다음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고 살짝 꼬리를 단 교과서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서야 되겠는가. ‘일장기가 내려간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가다’는 서술에 대해 어떤 필자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변했지만, 말장난이다. 역사적 사실도 전개 방식이나 비중 배정, 표현에 따라 커다란 인식 차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나. 이러니 중·고생 절반 이상이 6·25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 대입수학능력시험부터는 처음으로 국사 과목 출제범위에 근현대사가 포함된다.

문제가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 절차나 시기로 시비할 일이 아니다. 다만 극우로 흐르는 등 또 다른 편향이나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교과서 검정은 내후년에도 시행된다. 그때까지 검인정 제도를 철저히 손질해야 한다.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바람을 타지 않는 ‘대한민국 교과서’를 우리 아이들 손에 쥐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