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더슨의 국회프락치 자료 사후 20년만에 책으로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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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 1948년 8월15일

옛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이승만 대통령 옆에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과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이 앉았다. 이 자리에 미 대사관 3등 서기관이자 국회 연락관인 26세의 청년도 참석했다. 이 대통령의 바로 뒷줄이었다.

#2. 1963년 3월25일

이른바 ‘리영희 사건’이 터진다. ‘미국이 추가 원조를 박정희의 군정 연장과 연계해 보류하고 있다’는 식으로 알려진 ‘특종’ 사건을 말한다.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던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가 미 대사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쓴 기사다. 한국의 독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1급 한국통’인 41세의 외교관은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추방됐다.

#3.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괴한들에게 납치된다. 소식을 접한 이들은 주일 미 대사관에 연락하는 한편 미국 동부 터프트대의 지한파 교수에게 급보를 날린다. 그는 미국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온 인물이었다. DJ납치 소식은 그를 거쳐 당시 백악관 보좌관인 키신저에게까지 전달된다. 다음날 오전 DJ가 구출되기까지 그는 이 급박한 ‘핫라인’에 속했다.

세 장면의 주인공은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사진). 그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생생한 목격자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적인 체험자였다. 이러한 경험은 증언의 차원을 넘어 한국학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낳았다. 그가 68년 하버드대에서 펴낸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출간 40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외 대학에서 한국학 교재로 쓰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해외에서 한국학을 1급으로 끌어올린 독보적 저작”이다.

헨더슨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20년. 그가 남긴 연구 자료가 독특한 방식을 거쳐 학술서로 부활했다. 김정기(68)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최근 출간한 『국회 프락치사건의 재발견Ⅰ,Ⅱ』(한울)이다. 김 교수는 헨더슨이 유품으로 남긴 ‘국회 프락치 사건’ 자료집을 유족으로부터 넘겨 받아 고인의 연구를 재구성했다.

정부 수립 이듬해인 49년 벌어진 ‘국회 프락치 사건’은 당시 미 대사관의 국회연락관이었던 헨더슨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남로당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제헌국회의원 13명이 구속됐고, 이들 전원은 최고 10년까지 실형을 선고 받은 사건이다. 반공주의자였지만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헨더슨에게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자신을 선출한 의회에 가한 ‘쿠데타’였다. 이후 한국의 정치가 ▶의회주의의 무력화 ▶사법부의 시녀화 ▶권력의 독점화로 흘러가게 된 중대한 국면이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헨더슨은 대사관 직원을 보내 당시 프락치 사건 재판의 모든 과정을 기록해뒀다. 이는 국내외 연구가 다루지 못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책에 헨더슨에 대한 전기적인 자료도 상세히 함께 담았다. 63년의 이른바 ‘리영희 사건’에 대해 헨더슨은 “다른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같은 용기에 처넣었다”는 표현을 쓰며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어 흥미를 끈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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