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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차이나] 타이완 정계의 2인자 쑹추위(宋楚瑜)와 클린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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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미국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이 타이베이에서 장징궈(蔣經國)과 회견하는 모습, 가운데 통역을 맡고 있는 사람이 쑹추위다.

타이완 정계의 '2인자' 쑹추위(宋楚瑜)는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湖南)성 상탄(湘潭) 사람이다. 1949년 부모를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왔다. 1960년 타이완 정치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정치학 석사와 카톨릭대학에서 도서관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워싱턴 조지타운대학에 들어가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두명이었다. 한명은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진 커트패트릭(Jeane Kirkpatrickㆍ1926-2006)여사다. 그녀는 아버지 부시인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주요 참모였다. 그녀는 미국 신보수주의자(네오콘)의 대모(代母)로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다면 독재정권과도 손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 '커크패트릭 독트린'(Kirkpatrick Doctrine)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또 다른 지도교수였던 클라인은 일찍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만지부장을 맡아 장징궈(蔣經國)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74년 쑹추위는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행정원간임(簡任)비서’직함을 달고 타이완으로 귀국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총통의 영어번역을 맡으면서 타이완 정계에 입문했다.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해 1977년에는 ‘신문국 부국장’ 자리에 올랐고 다음해에는 ‘총통부 비서’에, 그 다음해에는 ‘신문국 대리국장’으로 승진했다. 두각을 나타내며 국민당 중앙위원에 당선된 그는 중앙문화공작위원회주임(中央文工會主任)을 거쳐 1984년에는 국민당 중앙부비서장에 올랐다. 장징궈가 서거하자 그는 리덩후이(李登輝)를 총통으로 추대해 ‘쑹추위 없이 리덩후이 없다'는 유행어를 만들어내 리덩후이의 가장 유력한 막료가 됐다. 그 힘으로 그는 1994년에는 ‘타이완성장’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1999년 쑹추위는 국민당과 갈라선다. 2000년 타이완 총통선거에 독자적으로 출마했지만 천수이볜(陳水扁)에게 30만 표 차로 아깝게 패배한다. 선거에서 진 뒤 지지자들을 모아 친민당(親民黨)을 만들어 주석직을 맡았다. 2004년 총통선거에서 쑹추위는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와 연대해 정·부통령으로 함께 출마했으나 천수이볜의 ‘3ㆍ19 저격’ 사건으로 미세한 표차로 또 지고 만다.

2005년 5월에는 타이완 유력 정치인으로는 56년 만에 처음으로 대륙을 방문해 ‘탑교지려(搭橋之旅)’라 불리는 타이완과 본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중국의 장관급인 천윈린(陳雲林)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장 겸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의 지난 3일 타이완 방문도 쑹추위가 이때 놓은 다리를 건너온 셈이다. 중국 정부의 장관급 대표단이 59년 만에 대만해협을 건넌 것이다. 쑹추위가 대만해협을 건넌지 3년만이다. 타이완과 대륙은 이제 대삼통에 합의했다. 양안이 본격적인 통합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2006년 10월17일 쑹추위는 초당파 독립 후보 신분으로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4.14%만을 득표하는데 그치자 기자회견을 자청해 타이완 정계를 떠났다.

위의 사진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이었던 1984년 타이완을 방문한 클린턴이 장징궈 당시 총통과 회견하는 모습이다. 가운데에서 통역을 맡은 인물이 쑹추위다.

이후 클린턴은 9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 연임까지 했다. 하지만 쑹추위는 타이완 총통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흑인 오바마가 새로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바마는 중국에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오바마 당선자의 머리속에는 중국이 가득 들어차 있을 것이다. 중국 언론 역시 오바마의 이복 남동생이 중국인과 곧 결혼할 것이며, 매제도 화교라며 오바마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나섰다.

장징궈, 쑹추위, 클린턴의 빛바랜 사진이 새삼 새롭게 보이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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