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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케인스 정책의 양지와 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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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케인스와 그의 이론을 발전시킨 후대의 경제학자들이 인류에 남긴 귀중한 유산은 시장에 큰 구멍이 났을 때는 정부가 나서서 그 구멍을 메워줘야함을 가르쳐준 것이다. 금융 시스템에 구멍이 생기면 화폐를 발행해 막아주고, 금리를 인하해 가계와 기업의 숨통을 터주는 것은 중앙은행의 역할이다. 그러나 불황의 골이 깊으면 이런다고 소비와 투자가 되살아나지 않는 법이다. 그러면 정부가 지출을 증가하여 소비와 투자에 생긴 구멍을 메워줘야 한다.

지금 세계는 이러한 경기부양책에 목을 매고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뒤에는 그때와는 달리 세계가 케인시언 정책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마음놓고 경기부양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구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화폐를 사용하는 국가가 많은 양의 단기외채를 갖고 있다면 경기부양이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

금리인하는 국내 채권의 매력을 감소시켜 외화 이탈과 환율상승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있다. 또 정부가 지출을 증가하기 위해 꾼 돈은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국가의 담세 능력이 허약하면 투자자들은 결국 정부가 돈을 찍어내어 빚을 갚을 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까운 장래에 물가와 환율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투자자들은 즉시 자금을 회수한다. 우리 돈은 외국에서 안 받는데 긴요한 수입품을 구입할 외환이 없다면 두 손을 드는 수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이 달러와 유로라는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경기부양 정책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경제사학자들은 대공황 당시 선진국들이 거꾸로 긴축정책을 사용하여 공황을 악화시켰던 것은 당시 결제수단이었던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함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국제통화기금(IMF)을 설계한 케인스와 화이트는 회원국이 쓸 수 있는 부양정책의 반경을 넓히기 위해 국제 자본이동을 제한하는 제도를 추천하였다.

지난 수십 년간 위기를 맞은 개발도상국들은 경상수지를 개선하고 IMF를 만족시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을 긴축해야 했다. 98년의 한국도 이 중의 하나였음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헝가리도 위기의 한가운데서 정부지출을 삭감하고 세금을 늘리고 금리를 올리는 거꾸로 가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경제정책에도 양지와 음지가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현재 우리의 외환보유액과 금융건전성, 그리고 정부와 기업의 양호한 재무상태를 가지고도 외화유동성 위기를 맞는다면 이는 국제금융제도의 수치다.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신흥국가에 압력을 넣어 자본시장을 활짝 열게 하고, 그래서 선진국 은행의 통화공급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게 해놓고, 그 은행들에 문제가 생기자 통화를 회수하면서 자신들의 비상연락망에는 끼워주지 않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일도 역사에 종종 발생하는 법이다. 그리고 금융 패닉이란 원래 투자자들이 자라와 솥뚜껑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언론이 선제적인 금리인하와 달러 공급, 그리고 과감한 적자재정을 주문할 때 불안해하고 있었다. 회색지대에 있는 한국이 미국과 유럽을 그대로 따라 해도 될 처지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 협정은 그래서 참 고마운 일이다. 이제 간신히 선진국 간의 비상연락망에 비집고 들어가 양지를 향하여 한 발짝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은 금물이다. 내년 수출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택과 주식의 가격이 30% 하락하면 국내총생산의 크기를 능가하는 자산손실이 발생한다. 각국의 정부들이 이 커다란 손실의 충격을 국내총생산의 몇 %에 해당하는 정부지출로 막아낼 수 있을까? 국제 금융시장의 회복이 지지부진하고 내년 세계경제 성장률이 3%를 크게 밑돌면 우리의 수출과 경상수지가 위협받고 외화유동성 위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 가능성에 대비하여 기축통화와의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수출과 외환시장 전망에 따라 경기부양의 강도를 조절하는 보수적인 경제운용이 현명할 수 있다.

송의영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