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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쿠리 주연 영화 "페드라"를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불륜의 모험이라는 주제는 비슷하지만 영화.페드라'를 가로지르는 체험의 구조는 신화나 희곡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신화에서는신권의 절대적 권위와 가문의 위엄이 인간의 운명에 교차되고,라신의 비극.페드르'에서는 사랑과 죄의식 사이에서 분열하는 내면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그러나 영화에서는 인물의 갈등은 약화되고 단조로워지고 속화했다.
앨릭시스(앤서니 퍼킨스)는 아버지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스물네살의 젊은이.그의 불행은 근친상간에 있다.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는 전처의 아들을 남자로 사랑한 비운의 여인.그녀의 불행은 불륜을 이루지 못하는데 있다.성취될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기는 하나 그들은 혈통의 순수함과 사랑의 전제적 감정이라는 양극의 심리적 고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귀족이라는 계급의 족쇄는 영화에서 독특하게,혹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변주된다.앨릭시스는 금전에 구애받지 않는.외국 아이',페드라 역시 뭇남성들로부터 사랑받는 부르주아일 뿐이다.고전이 아닌 현대에서 금기를 넘는 인물상은 수정을 요구받 는가.페드라에겐 가문의 고귀함에 대한 의지와 그런데도 혈육을 부정하는 사랑의 폭력에 무너져내리는 심리의 이중성이 자리하지 않는다.그래서 그녀는 방황하지 않는다.현대 드라마의 캐릭터답게 정념의 일관된 추구자가 된다.질투의 화신,사랑의 전사가 되어 맹렬하게 돌진한다.
돌진의 결과는 참담한 죽음.이는 처음부터 줄곧 암시된다.어머니에게 기댄 목없는 아프로디테의 석상,사랑과 죽음을 노래하는 그리스 연가,커다란 관으로 묘사되는 차,페드라호의 침몰.슬프지만 귀에 익은 얘기다.
여기 새로운 점이 있다면 안나이다.안나는 영화의 내밀한 텍스트다.시녀이면서 고전 민담에 흔히 나오는 지혜의 노파,주술적인예언가,페드라의.모든 것을 아는'유일한 벗.페드라를 위로하고,잠재우고,옷을 벗겨주고,또 가장 아슬아슬한 광경 을 목격하는 유일한 존재.
내러티브와 페드라의 문밖에서 서성이는 여인이지만 중성적인 외모,그리고 앨릭시스를 저주하고 마침내 페드라의 임종을 허락하는은근한 서사적 개입을 통해 안나는 문 안으로 들어선다.페드라-아들-아버지의 삼각관계에 슬그머니 끼어드는 것이 다.
물론 줄스 대신 감독은 더 나아가지 않는다.예정된 모험의 비극성에 만족한다.그러나 그럼으로써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안나의.은밀함'은 완성된다.애정의 구도 뒤에 숨은 여인의 절망.메르쿠리보다 앤서니 퍼킨스의 유약한 인상과 이 대목 이 낡은.페드라'를 빛낸다.

<영화평론가 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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