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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가는간이역>5.연무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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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오후8시35분.대전기관차사무소를 떠나 논산 연무대역(鍊武臺驛)에 도착한 H-3791 무궁화호 기차가 잠시 호흡을 고른 후 신연무대 승강장을 향해 천천히 출발한다. 충남논산시연무읍 육군 제2훈련소.수많은 한국 남자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있는 곳.흔히 논산훈련소 혹은 연무대로 불리는이곳에서 훈련을 마친 모든 신병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연무대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근무지를 찾아 전국으로 이동한다. 오늘은 훈련소 28연대 2,3대대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친 7백50명의 사병이 배출되는 날.이들을 태우기 위해 11량의 객차를 연결한 무궁화호 기차가 훈련소 정문 앞 신연무대 승강장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12년 경력의 기관사 이종우 (39)씨.조수격인 기관조사 전재관(28)씨가 함께 신경을 곤두세워 앞을 내다보며 기차를 운전한다.좁은 기관차 창밖으로 어두운 겨울밤의 풍경들이 느리게 스쳐 지나간다.
겨울의 벌판은 황량하다.기관차의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차가운 철길을 비춘다.빼곡이 들어찬 조종간과 계기판을 제외하면 두평이채 안되는 기관차 내부.두 사람 말고도 연무대역 역무원 최현규(40)씨가 함께 타고 있다.연무대역에서 신연무 대 승강장까지는 약 1.5㎞.이 구간은 역무원이 함께 타 기차를 유도한다.
훈련소 정문에서 연무대역까지는 구보로 30분 남짓한 거리.훈련소 바로 앞에 대형 승강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신병들을 탑승시키기 시작한 것은 지난 92년 8월부터다.그러니까 그 이전에 논산훈련소를 거쳐간 이들이라면 훈련소의 마지막 날 불안한 마음으로 어두운 길을 걸어 역까지 이동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5분만에 도착한 신연무대 승강장.길이가 1백 가까운 큰 승강장이다.어두운 저쪽,멀리 훈련소에서 신병들의 힘찬 군가소리가 들린다.아마도 논산훈련소에서 부르는 마지막 군가일 것이다.
승강장 가로등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임지까지 신병들을 호송해갈 12명의 호송병들이 도열해 겨울 밤하늘에 하얀 입김을날리고 있다.
오후9시.승강장 입구로 기운찬 발구름 소리가 들리고 이어 신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5열 종대로 대오를 이룬 그들.승강장입구에서 잠시 멈춰 서는가 싶더니 이윽고.와'하는 함성과 함께힘껏 내달려 맨앞줄부터 자기가 타야할 객차 앞 에 자리를 잡고선다. 잠시후 호송병들의 지휘에 따라 차례대로 열차에 오르는 신병들.이제 그들은 훈련병이 아니다.당당한 육군 이병 아무개들이다..생활기록카드'가 들어있는 노란 봉투와.수양록'을 한손에들고,다른 손으로는 더플백을 짊어진 젊은 그들이 객차 에 올라자리를 잡는다.
오후9시30분.그들을 훈련시켜 국군으로 만든 사람들.28연대장,2.3대대장 이하 각 중대장과 소대장,그리고 그렇게도 무서웠지만 이제는 정이 담뿍 든 훈련조교들이 먼 길을 떠나는 그들을 배웅한다.
오후10시.객차 1호칸에서 11호칸까지를 도는 연대장의 마지막 인사가 끝났다.떠나는 이들을 위해 연주하는 훈련소 군악대의군가가 논산의 겨울 하늘위에 퍼진다.열차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연무대역으로 향한다.
잘 가거라.아우.후배.아들들아.혹은 인제로,혹은 연천으로.어느 곳에 가든 2년 남짓한 너희들의 희생으로 우리들의 밤과 낮이 평안할 것이니.
〈논산=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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