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칼럼>외로움을 술로 푸는 아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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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얼마전 「대전 유성」이라고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았다.발신인은 그저 「대전에서 주부」라고만 돼있었다.
『두현이 엄마는 수시로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처음에는 속상한일이 있어 한잔했거니 하고 말았지요.그후로도 밤늦은 시간에 불그레한 얼굴로 우리집에 와 즐겁지 않은 생활이며,남편의 무심함이며,세상이야기를 구슬프게 늘어놓곤 했습니다.힘 겹게 뜨는 눈꺼풀,정확하지 못한 발음들은 듣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지요.2,3일 간격으로 반복되는 두현엄마의 술마시기는 습관성으로 발전했습니다.집안의 주방기구들은 어지럽게 널려있는가 하면 아이는 엄마의 흐트러진 말을 따라하는등 엉망이었습니다.평소 정갈하고 깔끔한 두현엄마가 습관성 음주자가 된 것은 폐쇄성이 강한 자신의 성격과 가정에서 쌓이는 우울.불만이 맞물린 때문인듯 합니다.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발신인은 편지 말미에 주위에 의외로 습관성 음주에 빠져든 주부들이 많다면서 가정의 기둥인 주부 음주는 가족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으니 이런 문제에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음주문화가 주부들에게까지 파고들고 있다.아침식사후 집식구들이학교며 직장으로 제각각 찾아나간후 시작되는 주부들의 「이웃에 놀러가 차한잔 마시기」가 어느 틈엔가 「맥주 한잔」으로 바뀌었다.점심때 중국요리를 배달시켜 먹으며 고량주를 비우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고 들린다.
모임에서 만난 한 고위공직자는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선물받아 집에 둔 고급 양주가 자꾸만 동이 나는 겁니다.처음엔 내가 그렇게 많이 마셨나 하고 반신반의했지요.그런데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집사람이 의심되더군요.』 심심해서 한두잔 홀짝거리던 그의 부인은 이제 양주 한병을 거뜬히 비울 정도의 실력(?)이 됐다고 한다.「심심해서」「잠이 잘 오니까」하면서 마시기 시작한 술이 습관성 음주로 발전하고 급기야 알콜중독에 빠지게 된다.
성(性)차이에 따른 혼외관계 행태를 연구한 그래스와 라이트에따르면 결혼에서 남편들은 성행위에 중요성을 부여하지만 아내들은동반자 의식이라든가,의사소통 같은 애정측면에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한다.
『전화라도 걸려오지 않으면 하루종일 입을 뗄 일이 없어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한 주부의 고백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주부들의 소외감은 이제 위험수위에 다다랐다.외로움에 지친이들을 두고 『팔자좋은 여편네들의 정신적 사치』 라고 비웃거나『배가 고파봐야 정신차린다』고 힐난할 때는 이미 지났다.더 이상 주부를 홀로 팽개쳐 두어서는 안된다.
홍은희 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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