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넘어>한국,세계적 피아니스트 왜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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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지난해 서울대 교수로 임용돼 음악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피아니스트 백혜선(白惠善.31)씨.2학기가 끝나면 서울대에 휴직계를 내고 미국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서울이라는 도시가 피아니스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살때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예원학교 3학년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잉글랜드음악원에서 러셀 셔먼 교수를 사사했다.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2위,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3위에 입상해 피아니스트로서 남부럽지 않은 길을 걸어온 셈이 다.그러나 이런 식의 「금의환향」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다.
『정말이지 피아노 뚜껑을 덮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어요.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시달리면서 교육이나 음악 외적인 것에 신경쓰다 보니 이러한 풍토에 흔들리고 휩싸이는 것같아 일종의 위기감마저 듭니다.』 한국은 세계 최대의 피아노 생산국이면서 1위의 수출국.가구수 기준 피아노 보급률은 13%로 일본(18%).미국(17%)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이라면 어릴때 「체르니 40번」까지 안쳐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현재 서울에만 음악학원이 2천5백여개,음악교습소가 1만3천여개.피아노 레슨비로 지출되는 비용은 연간 4조여원.매년 5백명이 넘는 피아노 전공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왜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안 나오는 것일까.줄리아드를 나와 71년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백건우(50)씨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중일 뿐 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위에 입상한 정명훈(43)씨는 일찍 이 지휘자 겸업을 선언했고,부조니 콩쿠르 1위.뮌헨콩쿠르 2위에 입상한 서혜경(36)씨는 경희대교수로 국내에 정착했다.또 커티스음대 출신으로 83년 리즈 콩쿠르에 2위 입상한 서주희(29)씨도 최근 활동이 뜸하다.피아노 인구는 많은 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이어」왕국의 함정=국내 피아노 교재의 「왕」으로 군림해온 바이어(통칭「바이엘」)는 피아노 기초교육을 처음부터 병들게한 장본인.1850년께 출간된 독일의 피아노교재로 오른손은 선율,왼손은 반주라는 낭만주의 초기의 기법에 충실 하다 보니 다양한 음악성을 기르는데 미흡하다.1876년 일본에 소개된 후 한반도에 상륙한 이 책을 지금도 사용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현재같은 주입식 교육으론 기계적인 손놀림은 뛰어날지 몰라도 대학졸업후에 음악적 개성을 펼쳐나가기 엔 어림도 없다.왜 그런테크닉이 필요한가를 먼저 알려주고 저절로 몸에서 우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독방에 갇혀 시드는 인재들=피아노는 바이올린과 달리 여러개의 선율이 함께 진행되는 「작은 오케스트라」.여기에 자신만의 음색을 실어 「노래」한다는 것은 고도의 음악성을 필요로 한다.
피아노곡 말고도 성악곡.관현악곡의 이해가 필수지만 독방에 갇혀자기 음악만 하다보니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그럴수록 앙상블도 하고 다른 분야도 기웃거릴 줄 알아야 한다.옛날에는 과학.철학.정치.문학을 전공했던 개성있는 피아니스트가 많았지만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라톤에 출전한 단거리 선수격=고독한 피아니스트의 길에 종착역은 멀다.음악에 대한 애정보다 의무감과 강박관념에 시달리다보면 30대 전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슬럼프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테크닉을 깊이있는 음악성으로 발전시키지 못하 고 중도귀국등 안주의 길로 빠지는 것은 연주가의 대로(大路)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신동」이 아닌 다음에야 동양계 피아니스트들이 매니저.음반사의 주목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돈을 내면서까지 ICM등 매니지먼트사에 이름을 올 리는 연주자들도 있기는하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혹한 법.그냥 귀국해 대학에 출강하고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는 선배들의 전철을 밟게 마련이다.피아노 인구중 여성의 비율이 높은 것은 음악이 사회적 신분상승의 수단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대 음대에선 내년부터 피아노 전공에 남녀 비율을 두어 입시에서 남학생의 「전멸」을 막는 고육책(苦肉策)까지 나오는 상황이 됐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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