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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가는길>고창 선운사 도솔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선운사를 거쳐 도솔산 도솔암을 가는데 마치 인간 세상에서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다.사람이 입을 다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금언이 있다.호젓한 산길을 따라 계속 오르자 단풍의 화염(火焰)으로 발갛게 홍조띤 나무들이 「어서오십시오.이곳 은 도솔산입니다」라고 입을 열어 말하는 것같다.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黔丹)스님이 시창했다고하는 도솔암은 지장기도처로 유명하다.그래서인지 서울과 부산에서왔다는 신도들이 법당 밖에까지 나와 기도하고 있고, 요사에서는젊은 스님이 강사로 나서 목청을 돋우고 있다 .
그러나 나그네는 자연의 무정(無情)설법에 귀를 맡긴채 나한전을 지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석가마애불 앞에 서본다.최근에야보물 1200호로 지정된 동학도의 비원이 서린 마애불이다.동학도들 앞에서 동도대장(東徒大將)인 전봉준(全琫準 )과 그를 보좌한 총관령(總管領)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和中)이 술잔을높이 들어 서로 맹약했던 곳이라고 한다.그들은 일종의 비밀문서인 그 맹약문을 마애불의 가슴에 복장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복장한 부분을 사 각형으로 땜질한 회칠만 보인다. 지장보궁 문을 지나 1백8돌계단을 오르니 「지장보살」을외는 염불소리가 들리고 도솔천 내원궁이 드러난다.그러니까 내원궁은 도솔암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보물 280호인 지장보살이 봉안된 성소다.
도솔천이란 칠보로 단장한 외원.내원궁이 있고,미륵보살이 천인(天人)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욕계(欲界)의 여섯 하늘중 네번째하늘이라고 한다.그러니 나그네는 도솔천에 와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오는 길에 보았던 선운사는 외원궁쯤 될 것같고,좀전에본 마애불이 도솔천의 미륵보살님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도솔천이라서 그런지 부근의 가까운 산봉우리도 하늘과 연관된 이름이다.천마봉(天馬峰)이 그것인데,글자 그대로 「하늘의 말」이 머리를 치켜들고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니다.
『이곳은 동학의 성지입니다.도솔계곡에 자생하는 상사초들은 이름없는 동학도들의 영혼일 거구요.저 위 낙조대에서 칠산바다의 핏빛 황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요.』 한 스님의 말이다.스님에게 꽃과 잎이 다른 계절에 피고 져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상사초 얘기를 들으니 한(恨)이 실감난다.더구나 이 천연 요새같은 도솔계곡에서 관군에게 포위돼 수많은 농민들이 희생됐다고 하니 말이다.동학의 고혼들 이 이 도솔암 부근에 상사초로 환생한 것도 이 암자의 지장보살 원력일까.나그네 눈에는 상사초의 푸른 이파리가 그들이 품은 비원의 색깔같아 안쓰럽기만 하다.
*선운사매표소에서 4㎞쯤 되는 거리인데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린다. 승용차로 암자 입구까지 갈 수 있다.(0677-64-2861) 글:정찬주〈소설가〉 사진:김홍희〈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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