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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이유 없는, 그러나 이유 있는 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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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유 없는, 그러나 이유 있는 외도

(중간에 권혁재 사진 전문기자가 음료수를 사오겠다고 하자, ‘우리동네 온 손님인데 음료수는 내가 사야지’하면서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만 원짜리를 하나 꺼냈다. 권기자가 그 돈을 받아들며 ‘예 선생님 주신 돈으로 사겠습니다’ 라고 답하자. 특유의 너털웃음을 ‘파~’ 하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원어치 다 사와~!’)

Q. 요즘 세상이 너무 강팍합니다. 왜 그런걸까요?

1등주의 때문이겠지. 정치, 사회, 문화의 근간이 되는 교육에 가장 큰 문제가 있어. 사회가 건강하려면 교육과 종교 그리고 철학이 3위 일체가 되야 하는데, 종교 따로 존재하고, 철학은 보이지 않고, 정치는 포용을 않아. 그러니 사회가 분열되고 서로 등을 돌리는 거겠지.

Q. 정치는 어떻습니까?

정치는 국민이 왜 살아야 하나, 어떻게 존재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해. 정치가 삶의 철학과 종교의 의미로 나가지 못했어.

Q. 그래도 선생님은 참 굴곡없이 평탄한 삶을 사신것 같은데요?
두루뭉실, 설렁설렁,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살아서 그래.

Q. 그렇게 사는 것도 보통 내공이 아니면 어려운데요. 선생님의 삶의원칙 같은것은 어떤 것인가요?

내가 영화하면서 한문을 좀 배웠거든. 유현목 감독의 ‘문’ 이라는 영화를 할 때, ‘樂而不流 哀而不悲 (낙이불류 애이불비)’라는 말이 나왔어.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하지 않는다’ 이런 뜻인데, 그후로 이걸 애들에게 가훈으로 들려줘. 즐거워도 질탕거리지 말고, 슬퍼도 너무 아파하지마라, 내 성격과 맞아. 담담한 마음이지.

Q. 그런데 그 담담한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음 담담하다는 말은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이 좋아하던 말이거든. 옛날에 내가 그 회사에 가보니 ‘담담한 마음을 갖자, 그래야 총명함을 얻는다’ 뭐 이런 말이 있어. 정확하지는 않아. 현대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건데. 어쨌건 그건 중용적인 것을 가리키지. 뭐랄까 2,3 등 정도하는 목표랄까. 그런거야. 공부 ,운동, 심지어 겜블을 해도 너무 이기면 불편하잖아. 음식도 너무 잘 먹으면 뱃병이 나고. 그저 잘하면 2,3등 아니면 4,5등 목표를 이렇게만 해도 엄청난건데 꼭 1등 하려고 하니까 그게 안돼.

Q. 그건 사회가 그렇게 만들지 않나요? 1등만 인정해주고, 1등을 안하면 마치 낙오자가 되는것처럼 취급하는 사회 말이죠.

맞아. 모두 1등을 향하기 때문에 힘들지. 1등은 한 명 뿐인데. 우리 어릴 때 교육이 그랬어. 유치원에 가면 칠판에 ‘누가누가 잘하나’ 이렇게 적혀 있거든. ‘모두모두 잘해야지’, ‘누가누가’ 그러면 모두 망가져. 여기 여 쥐똥나무 한번 봐. 여기 어느 놈은 저 혼자 막 잘자라. 그런데 그놈을 안 짤라주면 모두 폐허가 되거던. 전지를 잘해줘야 이렇게 예쁜 담장이 되지.모두 같은 이치인데 말이야..

Q. 그럼 선생님이 정치를 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 목적이셨나요?

정치했을 때, 문화행정 문화정치를 하려했지. 문화가 기본이 되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거든. 원래 문화를 가리키는 ‘컬쳐’라는 단어는 경작한다는 뜻이거든. 농사를 잘 지으려면 돌도 나르고 물길도 내고 해야 하듯이 문화가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처음부터 그걸 하려고 정치한건 아니었어. 이왕하려면 그걸 해야 한다는거지.

Q. 정주영 회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선생님이 정치를 하신 것도 그분 때문이죠?

맞아. 정주영씨 때문이지. 정주영씨가 비례대표 4번을 하라는데, 나는 솔직히 비례대표가 무엇인지 몰랐어. 아마 국회의원 후보로 나가서 ‘선전’ 좀 하라는 뜻이었겠지..솔직히 나는 준비도 안돼 있었고 생각도 없었어..하지만 ‘문화’라는 부분에 뭔가를 할 수는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어.

Q, 권한다고 정치를 하실 정도로 정주영 회장과 친해진 특별한 동기라도 있으셨습니까?

드라마를 마치고 정회장 집으로 초대를 받았어. 그 분이 사극을 즐겨 보신다더군. 그런데 그 댁에서 술 먹고 스테프들간에 충돌이 좀 있었어. 그때 내가 나서서 말렸거던. 그랬더니 그 어른이 내 어깨를 탁 치며 ‘당신 말이야 수놈 기질이 있군’ 그러시더라구. 이후 가끔 식사에 초대받고 만나고 했지. 그러던 어느날 한 번은 전원일기에 출연하고 싶다는 거야. 농사는 나보다 잘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 그때 우리가 20분 분량을 준비해놓고 진짜 기다렸어. 그런데 결국 출연을 못했지. 회사 간부들이 얼마나 말렸겠어. 허허.

Q. 직접 만나본 정주영 회장은 어떤 분이시던가요? 인간적인 면모가 알려진 것과 같으시던가요?

나는 그분에게서 비법의 상식을 느꼈어. 그분이 땅을 다루는 철학이 자기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거던. 아산만에 배를 가지고 방조제 막을 때, 내가 물어봤거든, 그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그랬더니 ‘이사람 농사 안지어 봤구먼’ 그래. ‘ 논에 물꼬를 막으려면 말이야, 거기다가 지푸라기 덩어리 하나 던져놓으면 여러 지꺼기가 뭉쳐서 저절로 막히거든. 방조제 막는거나 그러나 뭐가 달라’ 이러시더라고. 대통령 나온 것도 그런 면에서 쉽게 생각한거지. 돈 있고, 현대가족 있고, 통계를 쉽게 내고, ‘하면된다’고 생각하고 출사표를 낸 거고.

Q. ‘영웅시대’에서 정주영씨 역을 맡아 재연을 하셨는데 감회가 새로우셨겠는데요?

영웅시대에서 소몰이 방북까지 방영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위쪽 눈치보느라고 60대까지만 하고 70대는 안들어 갔어. 그러나 내가 그 분을 만난건 그분이 70 전후일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거던. 대선 후 귀도 안들리고 귀소본능이 생겨서 소를 몰고 이북가겠다 하는걸 쭉 지켜봤어. 그리고 나는 그걸 재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 그런데 정작 못 본건만 그리고 내가 직접 본 모습은 못 그리고 말았지.

Q. 어쨌건 실제 국회의원을 해보시니까 어떠셨어요?

문화와 교육에 문제점을 보고 나왔지. 내가 들어가서 보니까 교육이 더 심각하더라고. 이걸 알려고 하니 4년 임기가 지났어. 그때 YS 가 불러, 국회의원 더하고 싶지 않냐고. 그래서 더 하고싶은 생각 없다고 했지. 하지만 건의할 것은 있다고. 그리고는 교육과 문화에 대한 얘기를 했어. 예정보다 20분 넘게 길게 얘기했지. 그랬더니, 그문제 풀려면 국회의원 더 해야 해결된다고 그래. 그래서 영등포에 출사표를 냈지. 나는 김민석이 누군지 몰랐어. 그런데 김민석이 ‘최불암은 무대로 김민석은 국회로’ 라는 구호를 딱 내걸더라고.

Q. 선거구호가 절묘한데요? 그럴때는 보통 ‘구상유취’하다고 일갈하면서 받아치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아냐, 사실 그 얘기가 맞긴 맞는 얘기잖아. 떨어지고 나서도 어떤 사람은 나를 찍어주고도 ‘이번에 떨어진 거 잘됐어’ 그러고, 어떤 사람은 안 찍었다면서 ‘오히려 잘됐어’ 그러더라고.

Q.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안 하길 잘 하신것 같으세요? 아니면 내가 직접 좀 고쳐야 했다 싶으세요?

역시 안 하길 잘했어. 나는 고칠 능력이 없어. 싸워서 설득시킬 정치적 능력이 부족해. 역대 대통령들이 어지간하면 국회와 타협 안하고 거리를 둘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국회는 전형적인 패거리 정치거든. 부딪히는 부분은 모두 모순이고. ‘당’을 위하여 이렇게 충돌되는 모습들이 우습더라고. 내가 맞는 생각을 하면 그게 모이고 그 모인 것이 당이 되어야하는데, 당명으로 패거리가 되니까.

(정치에 대한 경험을 물으며 ‘문화발전을 위해서’와 같은, 상투적인 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정주영씨가 권해서’ 라고 답했다. 그리고 굳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소탈을 넘어 파격으로까지 느껴졌다. 듣던대로 겸허했다. 그의 진정한 매력이었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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