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멋과한국인의삶>7.한국미술에 나타난 破格美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멋의 정의(定義)는 사람마다 다르다.그러나 어느 경우든 멋이란개인적으로는 인격에서,집단적으로는 민족성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따라서 한국인의 독특한 삶의 방식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멋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멋에 대한 여러 정의 가운데 필자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대로 파격(破格)에서 일어나는 멋에 대해서만 다루어 보려 한다.파격미의 멋이라고나 할까.
내가 파격의 멋을 강하게 느낀 것은 황룡사(皇龍寺) 금당(金堂)의 치미(치尾)를 보았을 때였다.6세기말에 만들어진 이 치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높이가 2에 가까운 것이다.
양옆과 뒷면에 모두 스물네개의 연꽃무늬와 사람얼굴을 각 면의기하학적 분할하에 배치했다.
연꽃무늬는 틀을 쓰지 않고 손으로 주물러 힘차게 양감(量感)을 살렸는데,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초기의 기와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놀랍다.연꽃무늬를 손가락 끝으로 주물러 만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얼굴에는 두 종류가 있다.한 얼굴에는 수염을 코밑 뿐만 아니라 턱에도 나타내 할아버지임이 분명하니 수염이 없는 얼굴은 할머니일 것이다.
그런데 그 얼굴들이 그토록 천진난만하고 티없이 해맑고 명랑할수 없다.이들 기와는 능숙한 솜씨로 즉흥적으로 단숨에 만들어졌지만 신라인의 익살스러움이 이렇게 생생할 수 없다.이렇게 손으로 빚어 만든 기와들을 붙여 만든 치미는 동양건 축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뜻하지 않은 파격적인 조형이었다. 더 멋진 것은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려고 건립한 황룡사의 금당지붕에 이렇게 장난기 섞인 치미를 올려놓도록 허락한 감독자의 마음씨다.나는 이 거대한 치미에서 민중의 함성을 듣는다.
이 치미가 얹힌 금당의 위용을 상상해 볼 때 위와 아래가 하나가 되며 위가 아래를 포용하는 신라사회의 위대한 조화를 느낀다.신라에서는 또 익살스러운 토우(土偶)들이 다량으로 만들어지는데,이렇게 틀을 쓰지 않고 진흙을 손으로 주물러 만든 공예품내지 조각품은 오직 신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또하나의 파격적인 멋은 조선시대 초기에 한때 전국적으로 상당량만들어졌던 분청사기(粉靑沙器)에서 찾아볼 수 있다.흔히 말하기를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시기가 14~15세기인데 이 과정에서 청자가 분청사기가 되고,그 다음에 분청이 백 자에 흡수돼버리면서 사라진다고 한다.말하자면 분청사기의 출현은 한 과도기적 현상인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 분청사기는 그 독자적 존재이유가 뚜렷하게 보인다.그것은 전후와 연결되지 않은 그 나름의 독특한 멋을 거침없이 나타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기적 현상으로 다루는 이유는 쇠퇴한 상감청자를 분청사기의첫 단계로 삼고 덤벙분청(진흙을 붓으로 바르지 않고 덤벙 담갔다 건져낸 분청사기)을 백자와 연결시키는 최후의 단계로 삼았기때문인데 나는 달리 본다.
분청사기는 15세기 전반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백50년이란 상당히 오랜 기간에 만들어졌으므로 청자나 백자와 어깨를 겨루며 다른 차원의 조형감각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초기에는 관용(官用)으로도 만들어졌으나 백자를 만든 분 원(分院)이15세기 후반에 설치되면서부터는 대체로 서민용으로 공급됐다.
백토로 그릇표면을 바르고,초화(草花)무늬나 물고기 무늬를 내는 방법으로는 조화기법(彫花技法).박지기법(剝地技法).철화기법(鐵畵技法)등이 있다.이들 무늬는 매우 속도가 빨라 기세(氣勢)가 있으며 형태는 단순화돼 추상적이다.어느 경우 에는 무늬 자체를 선(線)으로 나타내지 않고 면(面)으로 처리하기도 한다.대담한 것도 있고,치졸한 것도 있으며,익살스럽기도 하여 청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 무늬들이다.귀얄기법(붓자국이나도록 넓은 붓으로 그리는 기법)에 이르러서는 빠른 속도의 귀얄무늬가 즉흥적으로 구성되어 때때로 놀라운 현대적 감각을 보여준다. 파격미의 멋을 우리는 조선시대의 민화(民畵)에서 또한 만나볼 수 있다.우리나라 사람은 민화를 속화(俗畵)라고 불렀었다.민화는 조선시대 그림의 모든 화목(畵目)에 걸쳐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화원(畵員)들이그렸거나 상류사회를 위한 그림들은 단연 민화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점이다.흔히 어전(御殿)의 어좌 뒤에 놓이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나 궁실에서 쓰이는 모란병풍,선비들의 방에 놓였던 최고급 책거리병풍(책을 쌓아둔 책장그림이 있는 병풍)등을 민화의 카테고리에 넣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민화연구의 실상이지만 이들을 민화라고 볼 수 없다.
민중이 그린 민중을 위한 그림만이 민화라고 나는 단언한다.이러한 민화의 유행은 18세기 이후에 일어나는 중류계급과 하층계급의 역사적 등장과 관련돼 있다.
민화에는 소위 전통회화의 모든 화목들,산수화(山水畵).화조도(花鳥圖).영모도(翎毛圖).풍속도(風俗圖).진경산수도(眞景山水圖).종교화(宗敎畵)등에 대응하는 그림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무명의 화가들은 중류계급이나 하류계급을 위 해 전문화가들의 그림을 모방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들은 교육을 받지 않은 까닭에 오히려 인간의 순수한심성을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그들은 놀랍게도 화면을 재구성하기까지 한다.원근법의 틀을 깨뜨리고,비례의 원리를 파기하고,강렬한 원색을 쓰면서 놀라운 파격미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
따라서 이들 민화에서 불가사의하게도 전문화가들은 상상도 할 수없는 현대적 감각의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파격미의 멋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시대의 치미와 토우,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민화등을 들었다.이것들은 모두일반적인 틀이나 법칙을 깨뜨린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거기에는 자유분방함이 있고,생명력이 있으며, 순수함이 있고,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함이 있다.대담한 변형이 있으며,즉흥적이고익살스럽다.끊임없는 반복에서 생겨난 속도와 놀라운 단순화와 추상성이 있다.이러한 조형의 특성들은 미술사가들이 다루는 미술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들 파격적인 아름다움의 배후에는 생생한 민중의 삶이 있다.
그 민중의 삶이 낙천적이고 익살스럽고 천진무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미술이 탄생한 것이다.경이롭고 감탄스럽고 사랑스러운 파격의아름다운 멋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멋진 삶을 뚜렷하게 읽어낼수 있다.
강우방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