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안 보였다 … 그러나 사시 붙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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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2차에 합격한 시각장애인 최영씨가 21일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김상선 기자]

 21일 서울 신림동 S원룸의 한 고시생 방. 책꽂이에 수험서라고는 『채권총론』과 『채권각론』 두 권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랫동안 보지 않은 듯 먼지가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책을 읽을 수 없는 수험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날 사법시험 2차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인간 승리’의 주인공은 최영(27)씨. 시각장애인이 논술시험인 사시 2차까지 합격한 것은 50년 사법시험 역사상 처음이다. 그는 면접시험인 3차 시험만 합격하면 법조인이 된다. 국내에는 아직 시각장애 법조인이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미 250여 명, 일본에서는 세 명이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씨는 희귀병인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사물이 형체만 흐릿하게 보이는 정도라 책을 읽거나 혼자 밖에 돌아다닐 수 없다. 그는 고교 3년 때인 1998년 병명을 처음 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야맹증인 줄로만 알았다.

재수 끝에 2000년 서울대 법대를 합격했을 때까지만 해도 책을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2004년 사법시험 1차에 낙방하고 다음 시험이 코앞에 다가왔을 즈음 최씨의 시야는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이는 단어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한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다음해 시험에서도 고배를 마신 최씨는 1년 동안 책을 덮고 살았다. 점자 시험 제도가 있었지만 그는 점자를 읽을 줄 몰랐다.

그러던 중 음성 지원 프로그램이 장착된 컴퓨터를 이용해 시험을 치르는 제도가 도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험 시간도 1차는 2배, 2차는 1.5배로 연장됐다. 최씨는 한 재단을 찾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를 이용해 음성으로 읽을 수 있도록 책을 파일로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최씨는 꼭 봐야 할 책을 과목당 2~3권으로 줄였고 일반 속도보다 2~3배 이상 빠르게 듣는 훈련을 했다.

최씨는 “시각장애는 무언가를 배우는 데 너무 높은 벽이었다”고 말했다. 식사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는 걸 제외하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귀는 혹사당해 가는 귀가 먹을 지경이 됐다. 그리고 지난해 5전6기 만에 1차 시험을 통과하고 올해 두 번째 치른 2차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최씨는 이날 경남 양산에 살고 있는 어머니 우종섭(50)씨에게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전했다. 정오 무렵이라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우씨에게는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우씨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전화기를 붙들고 울기만 했다. 아들이 희귀병에 걸린 게 항상 당신 탓이라며 미안해하던 어머니였다. 2차 시험 기간에는 일주일 동안 일을 쉬면서까지 함께 있던 어머니였다. 우씨는 “단 한 번이라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던 아들이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시각장애인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며 “문자를 음성으로 전환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어 머지않아 시각장애인도 재판 기록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이날 사법시험 2차 시험 합격자 1005명을 발표했다. 남성이 621명(61.79%), 여성이 384명(38.21%)이었다. 여성 합격자는 역대 최대 인원이었던 2006년 377명(37.62%)을 넘어섰다. 합격자 가운데 법학 전공자는 817명(81.29%), 비전공자는 188명(18.71%)이었다. 3차 시험은 다음달 18일부터 21일까지 치러지고 최종 합격자는 다음달 28일에 발표된다.

박유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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