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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이라크서 발을 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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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이 이라크에서 발을 빼는 정책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이라크를 민족적 또는 종교적 연방국가로 분리코자 하는 몇몇 제안과 달리 이 계획은 이라크를 하나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라크의 국가 이익에도 걸맞고 이라크 민족주의도 만족시킨다. 사실 '이라크 민족주의'란 용어는 "이라크가 1920년대에 비로소 독립국가가 됐다"는 논리와 함께 흔히 무시돼 왔다. 과거 영국이 민족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옛 오스만 제국을 한데 모았고 따라서 미국이 그걸 도로 나눠도 별 문제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라크는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거의 경계를 같이 한다. 그것은 3000~5000년 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비옥한 토지에서 발생해 아바시드 왕조의 황금기를 거쳐 1918년까지 영속한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20년대 영국의 점령에 대한 항거로 시작된 이라크의 20세기 반(反)외세 저항은 따라서 전형적인 민족주의 운동이지 분리주의 움직임이 아니다. 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에 영국의 통치에 맞섰고 58년 영국이 세운 하슈미트 왕조의 군주가 암살된 뒤 세속 공화국을 천명했다.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의 시아파에 맞서 함께 싸웠다. 시아파 일부는 4월 팔루자의 수니파 폭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라크 민족주의의 자양분은 미국의 점령이다. 정치적 혼란과 민간인 희생도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원인이지만 최근의 거센 반미(反美) 저항은 근본적으로 외세 점령에 대한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점령이 계속될수록 민족주의 저항은 강력해질 것이다. 미국에 동조하는 이라크인들도 결국 저항세력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국가주권과 점령 종식, 미군 철수, 이라크 주도의 개혁을 주창하지 않는 한 어떠한 지도자도 이라크와 이라크의 종교적.민족적 구성원(쿠르드족 제외)을 통합할 수 없다. 그것은 이라크가 자원과 치안, 외교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미군이 이라크를 정상화하는데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환상에 불과하다. 미군은 이라크인들의 주장처럼 이라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이라크에 대한 주권 이양이 예정된 다음달에 상황이 더 악화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미국은 이라크에 주권을 넘겨줄 의향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은 이라크의 모든 무장세력을 통제하고 그들을 자신의 수중에 놓길 원한다. 미군이 치외법권과 면책특권을 갖고 어떤 이라크 정부가 들어서든 간에 이라크의 정책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길 기대한다.

하지만 워싱턴이 이를 고집한다면 유엔이 승인한 새 정부 수립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다른 국제적 협력을 얻기 위해 바라고 있는 유엔 안보리 결의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정당한 이라크 민족주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군사.경제.정치적으로 강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저항세력을 진압하는 데 유엔이나 동맹국(특히 영국)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폭력은 계속되고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베트남전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는 엄청난 국론 분열에 휘말릴 것이다.

나는 앞에서 철군 계획이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공헌자는 전직 외교관이자 행정부 자문관이며 시카고 대학의 중동문제연구소 설립자인 윌리엄 포크다. 그는 미국이 철군을 결정해야 함은 물론 이라크 국민(유엔과 국제사회 역시)에게 미국이 가능한 한 빨리 철군할 의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이라크 자원을 독점하거나 군사기지나 병력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한다. 이제 정치.경제적 권한을 유엔과 이라크 임시정부에 넘겨주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다. 허드슨 연구소의 지적대로 "미국은 실패했다. 문제는 '앞으로 미국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인가'에 있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이훈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