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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명함은 필요없다 … 벤치 지켰던 그들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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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안정환·이동국·박주영·이천수·김남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15일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아랍에미리트(UAE)전에서 모처럼 ‘태극 전사’다웠다. 한 골을 넣어도 공세를 늦추지 않고 벌떼처럼 빠르게 상대를 몰아붙이며 4-1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스타들의 빈자리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K-리그 등 실전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들을 모아 퍼즐을 맞추자 더 멋진 그림이 나왔다.

최전방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한 정성훈(29·부산)이 대표적 사례다. 이동국·설기현과 동갑내기인 1m90cm의 장신 스트라이커는 이번에 처음 대표팀에 뽑혔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전에 이어 두 경기 연속 선발 출장하며 단숨에 이동국과 조재진의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그는 2002년 K-리그에 데뷔한 이후 울산·대전을 전전하다 올해 부산에 자리 잡은 ‘저니맨’이다. 지난해 대전에서 김호 감독으로부터 수비수로 전향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태극마크를 꼭 한번 달아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는 꿈을 이루자 한풀이라도 하듯 그라운드에서 혼신의 힘을 토해냈다. 상대 수비수와 거친 몸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상대가 오버헤드킥으로 공을 걷어내려 해도 머리를 들이밀어 부상당할 뻔하기도 했다. 골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헤딩으로 공을 떨어뜨려 동료에게 찬스를 만들어줬다. 고교 때까지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아 볼 배급도 뛰어나다. 그는 ‘재능 있고 헌신하는’ 공격수였다.

후반에 교체 투입된 김형범(24·전북)은 이천수보다 더 날카로운 프리킥을 쏘아댔다. 곽태휘의 헤딩골은 예리하게 휘어든 김형범의 코너킥에서 비롯됐다. 김형범은 K-리그 통산 20골을 뽑아냈는데 그중 절반이 프리킥 골이다. K-리그 26년 역사상 그보다 프리킥 골을 더 많이 넣은 선수는 없다. 이천수는 K-리그 통산 37골 중 9개를 프리킥으로 넣었다.

기성용(19·서울)은 중앙 미드필더의 새로운 아이콘이 됐다. 허정무 감독은 대표팀에서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박지성을 왼쪽 측면으로 돌렸다. 기성용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경고 누적으로 UAE전에 결장한 김남일이 다시 돌아와도, 그전처럼 주전 자리를 붙박이로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근호(23·대구)는 ‘움직임은 좋지만 골이 안 들어가는 게 문제’였던 박주영과 달리 2경기 연속 2골씩을 성공시켰다. 3년 전인 2005년 네덜란드 세계청소년선수권 때만 하더라도 그는 벤치에 앉아 늘 주전으로 뛰는 박주영을 바라보던 신세였다. 프랑스리그에 적응하고 있는 박주영이 “솔직히 대표팀에 뽑히지 않은 게 아쉽지는 않다”고 했지만 박주영은 이제 더 이상 대표팀의 붙박이 스트라이커가 아니다.

박지성이든 이영표든 누구나 무명 시절을 거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당시 이들을 발탁한 허 감독은 이번에도 과감한 실험을 했다. 세대교체와 경쟁유도라는 두 토끼를 노린 이 포석은 일단 방향을 잘 잡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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