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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시뇨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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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9년 미국 정부가 발행을 시작한 ‘50개 주(states)’ 기념주화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화폐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조폐국은 미국의 각 주를 상징하는 디자인을 넣은 25센트 동전을 해마다 5종씩 순차적으로 발매했다. 액면가로 발행된 기념주화는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미국 인구의 절반가량이 이 주화를 수집한 것으로 조폐국은 추산했다. 올해로 50종이 모두 나왔지만 “우리 쪽 기념주화도 발행해 달라”는 청원이 잇따랐다. 조폐국은 내년에 6종의 주화를 추가 발행키로 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미국 정부는 주화 발행으로 얼마를 벌었는가?” 25센트 기념주화를 찍어 내는 비용은 5센트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수익은 올해까지 무려 46억 달러에 이른다. 내년 발행분에서 추가로 4억 달러가 더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정부나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시뇨리지(Seigniorage)라고 한다. 50개 주 기념주화처럼 시중에 유통되지 않고 수집품으로 퇴장당하면 액면가(25센트)와 발행비용(5센트)의 차액이 모두 시뇨리지가 된다. 하지만 지폐처럼 계속 유통되면서 몇 년 내로 닳아서 폐기되는 경우는 계산법이 조금 다르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유통시키면서 획득한 금융자산의 운용수익이 시뇨리지가 된다. 연간 시뇨리지 총액은 현재 유통 중인 통화량×시장 이자율-발권·유통비용으로 계산한다. 시뇨리지는 달리 ‘인플레 세금’이라고도 부른다. 통화 공급을 늘려 인플레가 생기면 기존의 통화에서 실질가치가 줄어들고 그만큼의 부가 중앙은행에 이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내에서만 이뤄질 경우 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제 금융결제의 기축통화, 미국 달러화의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미국이 발권량을 늘려 그로 인한 인플레가 생기면 전 세계의 달러 소유자로부터 줄어드는 실질가치가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1944년 달러가 국제 기축통화로 결정된 이래 미국이 국제적으로 챙긴 시뇨리지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이다. 13일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이 금융회사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달러를 무제한 방출한다고 발표했다. 중앙은행끼리의 통화교환 한도를 무제한으로 늘리고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필요한 만큼 달러를 찍어 내겠다는 것이다. 부럽다 시뇨리지 효과, 부럽다 국제 기축통화 달러.

조현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