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납세자의 돈'과 '세금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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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결실의 계절 가을,나라의 곳간에 풍성한 결실 대신 「풍성한」비리(非理)로 곳간이 줄어드는 소리만 높다.국정감사 시즌이 되면서 폭로되는 온갖 부실(不實)과 비리소식에 국민들은 우울하기만 하다.매일매일 터지는 부실과 비리 행진을 보 면서 이 나라가 이렇게라도 돌아가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방송사업자 선정지연으로 무궁화위성 1호기가 하루 9천3백만원을 낭비하면서 헛돌고 있다는 지적,지하철 6호선의 곳곳에서부실공사한 부분이 적발되고 서울시내 도시가스관 부실매설이 1백1곳에 이른다는 보도,분당.일산등 신도시에서 각종 시설물 하자가 4만6천5백61건으로 밝혀졌으며 노태우(盧泰愚)씨에게 뇌물을 준 재벌 20곳에서 1천3백억원의 세금추징이 안되고 있다는주장,지난 78년 이후 원전고장이 2백88회에 이르며 1993년 이후 정부가 맑은 물 대책으로 8 조원을 투자하고도 4대강의 수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마침내 대통령의 해외순방비가 그동안 4백10억원에 이른다는 주장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그 모든 부실과 낭비는 결국 나라의 예산으로 보충되게마련이다.부실시공한 공공시설에 대해 보완공사를 하거나 수명단축으로 빨리 철거하게 되면 그 손실은 결국 국민에게로 돌아온다.
무궁화위성이 헛돌고 있다면 국민의 세금으로 쏘아올린 경 비가 벌충되지 못하는 셈이다.이 엄청난 부실과 하자와 낭비는 모두 다름아닌 우리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우리가 낸 세금으로 국고가 채워지고 그 국고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털리고 있는 셈이다.
「소경 제 닭 잡아먹기」고 「주머니돈이 쌈짓돈」인데도 우리 국민들은 이 모든 일에 무관심하기만 하다.납세자권리헌장 제정에열을 올리고 세금부과 취소소송을 제기하는데는 뒤늦을세라 앞장서지만 정작 자신이 낸 세금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 는지,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도무지 무신경이다.
부실시공자는 마땅히 그 보완공사비를 부담해야 한다.아니면 재시공 명령으로 턱없이 남긴 공사비를 토해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떤 시설물이 원래의 기간을 채우지 못한채 부실로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 기간 만큼 손해배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그런 부실공사를 방지하지 못하거나 묵인한 모든 감리업자와 공직자는 자신의 재산으로 물어내야 한다.이 당연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때문에 이 나라는 「부실천국」이 되고 만 것이다. 금년 한해 예산은 총 71조6천20억원.작년보다 13.7%늘어난 것이다.국민 한사람이 부담해야 할 평균 세액은 2백6만원.조세 부담률도 21.6%로 늘어났다.이 천문학적 돈 가운데얼마가 또 깨진 하수구로 흘러나가 버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감사원이 국가예산집행 감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불충분하다.감사원이 담당하고 있는 수감기관이 60만5천개가 넘고 직원 1인당 79개 기관을 감사해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국회가 국정감사를 통해 예산감시와 집행의 견제를 하고 있으나 역시역부족이다.「매미가 한철」이듯 국정감사 기간중의 폭로도 한철이다.그나마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지적한 사항이 금년 7월말까지 시정된 것은 32.6%밖에 안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예부터 과다한 세금징수와 국고의 낭비는 민란과 소요의 원인이되어 왔다.미국의 독립전쟁도 「대표없이는 세금도 없다」는 구호로 시작되었다.서양에서 시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구호,행정기관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단어는 바 로 납세자(tax-payer)라는 말이다.
납세자는 자신의 돈이 어디에 사용되는지 스스로 꼼꼼히 챙기고감시하거나,그런 목적을 가진 시민단체에 기부 또는 자원봉사등의방식으로 돕는 것을 예삿일로 생각한다.아니 당연한 시민의 의무로 여긴다.
「퍼블릭 시티즌」「커먼 코즈」등 미국만해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부지기수다.우리나라에도 같은목적을 가진 시민단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가 설치한 「시민의 눈」이나, 부패추방운동시민연합의 고발창구 전화는 낮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볼멘 소리다.이제 납세자인 한국의 국민들도 긴 잠에서 깰 때가왔다.자기 곳간을 자기가 안 지키면 누가 챙겨줄까.
박원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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