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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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 지인이 불평했다. “지난 금요일자 1면 머리기사 있잖아요. 그 주인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봐요.” ‘대한민국 중산층, 잔인한 10월’ 제하의 기사 얘기였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삼중고를 겪고 있는 한 중견업체 임원에 비춰 요즘 우리네 중산층의 애옥살이를 짚어본 피처 스토리였다. 지인의 말인즉슨 “어떻게 가진 돈(2억7000만원)보다 더 큰 액수(3억원)를 빚내 집을 살 수 있으며, 그 정도 연봉(7200만원)으로 딸내미를 1년 넘게 미국에 연수 보낼 수 있느냐”는 거였다.

하긴 나도 신기하던 터였다. 월급받아 근로소득세와 국민연금·건강보험에 뭉텅 떼이고 각종 공과금·관리비로 움큼 뜯기고 나면 밭은 생활비 정도 남을진대 거기에서 더 큰 뭉치 대출이자와 유학비를 긁어내고 어찌 살림을 꾸릴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위기 아닌 호시절일지라도 손가락만 빨고 지내야 가능한 얘기 아니런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 임원은 그러고도 여윳돈이 있어 펀드에 넣었다가 반 토막 나고 말았다.

 지인의 지적대로 그 임원이 대한민국 중산층의 평균적 모습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징성은 있다는 게 내 대답이었다. 주택 구입을 위한 은행 대출(집값이 구입가보다 더 떨어지지 않았으면 다행인), 노후 대비를 위해 가입했다 망가진 펀드(장기적으로는 괜찮을 것이란 말에 위로받는), 보다 나은 자녀 교육을 위해 등 떠밀린 기러기(유학은 아니더라도 미친 사교육비에 등골이 휘는) 중 하나라도 안 걸리는 중산층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모든 짐을 다 짊어졌으니 언론으로선 더없이 경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런 극적인 예가 아니라 세 가지 짐을 하나씩 짊어진 세 사람의 이야기였어도 좋은 기사가 될 수 있었을 터다. 그 역시 결코 정상이 아닌 까닭이다. 어떤 이유건 중산층에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운 나라가 잘 굴러갈 리 없다. 나라의 허리가 그 지경이니 외국 언론들이 틈날 때마다 우리 위기를 부풀려 보도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인구가 분당만도 못한 아이슬란드와 비교해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무리해서 잘나가다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들이 모두 우리네 중산층 모습을 닮았다.

아이슬란드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 달러가 넘는 부국이다. 하지만 그 부는 과거처럼 대구잡이를 착실히 해서가 아니라 GDP의 10배에 달하는 외채로 돈놀이를 한 결과다. 금융허브를 자처하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빚더미 위에 얹힌 부가 오래갈 수 없었다. 아일랜드 역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최고의 부자로 탈바꿈한 ‘성공신화’였다. 규제완화로 해외자본 유치에 성공해 1996년 이후 10년 동안 연평균 7%대의 높은 성장률을 이어갔다. 하지만 부동산 거품이 화를 불렀다. 인구가 430만 명인데 지난해만 10만 채의 주택을 지었다. 12배 인구의 영국이 18만 채를 지은 걸 보면 틀림없는 과열이었다. ‘사막의 기적’ 두바이 역시 국가부도설에 시달린다. 자랑이던 각종 인프라 스트럭처 사업 탓이다.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보니 빚이 GDP의 60%에 이르렀는데 금융위기로 돈줄이 막혔다.

 미국발 금융위기 탓에 겉으로 드러났지만 결국 스스로 키워온 재앙이었다. 국가건 개인이건 마찬가지다. 건강한 체질은 이겨내고 허약 체질은 쓰러지거나 앓아 누울 것이다. 역시 믿을 건 자기 체력뿐이며 몸이 견딜 만큼 짐을 져야 하고, 엎어지건 자빠지건 모두 자기 책임이란 걸 배운 게 소중한 교훈이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며칠 전 자기 칼럼에서 인용한 말이 이 글에도 어울릴 것 같다. 영국시인 존 돈의 말이다. “누구의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물으러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릴지니(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