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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주도적 학습이 이긴다

중앙일보

입력

입시에 치여 밥 먹을 시간도 쪼개 학교와 학원을 오가야 하는 한국의 고교생들. 교과서와 참고서 달달 외우느라 그 흔한 소설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없다. 이런 교육현실이 싫어 대안학교를 선택했다는 이들. 좀더 많은 경험을 통해 진정한 학습의 의미를 캐내고 싶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생의 정확한 목표를 세운 뒤 비로소 공부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서울대에 합격한 박성진(21·법대 1)·이제호(20·농업생명과학대학 2)씨는 대안학교인 분당 이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들은 ‘자기주도적 학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장기적 안목이 인생을 바꿨다

박성진씨는 삼수를 통해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치른 대학입시에서는 서울 소재 중·하위권 대학에 들어갈 만한 성적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정거래 사업가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강남권 중학교(원촌중)를 나온 박씨는 ‘경쟁’이 싫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어진 대학얘기. ‘공부 잘 하는 아이가 A학원에 다니더라’고 하면 우루루 몰려갔던 기억은 그를 공부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중학교 시절 학원 한번, 독서실 한번 가지 않았던 것도 남들과 경쟁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게 싫어서였다. 시험점수 1~2점에 울고 웃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었다. “중3 때 아버지가 이우학교 예비캠프에 가보라고 하셨어요.” 이우고 1기인 박씨는 학교 개교 전 실시된 예비캠프를 다녀온 뒤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됐단다. ‘도덕·윤리’ 대신 철학을 공부했고 NGO수업과 농사·생태환경 수업 등 세상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대안학교를 선택한 박씨의 삶은 고교 입학 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학생회장을 하면서 학생자치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진로상담을 통해 ‘직업’과 ‘사회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 지 고민하게 됐다”는 게 그의 얘기다. 고2 때는 1주일간 일본 물류회사 인턴사원으로 활동하면서 경영원리를 배웠고, 앞으로 공정거래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이는 결국 ‘공부해야겠다’는 의지를 굳히게 했다.

고3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지만, 기초실력이 부족해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한번의 대학실패. 그러나 박씨에게는 꿈이 있었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재수하면서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과 모여 공정거래 사업을 하려면 법학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어요. 제가 그 역할을 맡게 됐고…. 그때부터 법대에 가겠다고 결심했죠.”

또 한번의 실패.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는 삼수생활을 하면서 학습법까지 바꿨다. 모의고사 문제를 풀면서 유형별로 나만의 풀이법을 개발하고, 스스로 시간절약 비책과 찍기 방법까지 고안해냈다. ‘2전3기’로 박씨는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정거래 사업을 하고 싶다”는 그는 “공부에만 매몰돼 살아갈 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본에 충실하면 무서울 게 없다

이제호씨는 대안학교 출신 첫 서울대 합격생이다. 중학교(영동중) 때까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는 이씨. ‘공부를 왜 해야 하나’ 의심 한번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중3 중반까지는 특목고 입시도 준비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공부에 대한 억압 때문에 시험 때면 신경성 장염에 걸리곤 했다. “어느날 장염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병상에서 참고서를 외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어린 마음이었지만 ‘이건 아니다’ 생각하게 됐죠.”

공부하는 게 무서워진 이씨는 도피처로 대안학교를 선택했다. 뚜렷한 목표 없이 들어갔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다른 사람이 돼가고 있었다. 그가 흥미를 붙일 수 있었던 건 사제간 소통이 가능해졌기 때문. 작은 일이지만,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원웨이(One Way)’가 아닌 ‘쌍방향’ 수업을 하면서 공부에도 흥미를 붙여나갔다. 발표수업 덕분이었다. 그는 “무조건 외워서 시험보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발표수업을 하고, 잘못된 부분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사고력이 길러졌다”며 “발표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기초지식을 찾아 공부할 수 있었고, 자연히 공부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시위주 학습을 하지 않다 보니 고2 중반까지 모의고사를 보면 전 영역 4등급 수준에 머물렀다. 수도권 대학에나 갈 수 있는 점수였다. 그러나 발표수업 등을 통해 익힌 자기주도적 학습이 그때부터 힘을 발휘했다.

친구들과 모여 수학·논술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했다. 5명의 팀원들이 일정 분량을 미리 공부하고, 서로에게 강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영어과목도 외국교재를 선택해 주제별 토론을 하면서 기초부터 다져나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으니 금방 성적은 향상됐다. 이씨는 “주도적으로 학습하다 보면 취약부분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고, 공부도 재미있게 느껴진다”고 강조했다. 고3 때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공부에만 열중했다는 이군. 자기주도적 학습은 그를 결국 서울대에 합격시켰다. “기초가 잘 닦여 있고 공부에 흥미만 들인다면 수능점수는 반드시 오르게 돼 있어요. 점수 안 오른다고 조바심내기보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프리미엄 최석호 기자 
프리미엄 최명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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