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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와 달리 정부 간섭 안 받고 유행 타지 않는 ‘한 우물 정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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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03면

노벨 화학상을 받은 시모무라와 물리학상을 받은 고바야시, 난부, 마스카와(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시모무라·고바야시·마스카와는 나고야대에서 공부했다. AP·AFP=연합뉴스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일본 남부 나가사키(長崎)시의 한적한 항구도시 사세보(佐世保). 지난해 10월 이곳에선 팔순을 바라보는 노(老) 과학자의 강연이 있었다. 그는 당시 1년 뒤 있을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기초과학 연구는 산골짜기 시골에서 실험 도구 없이도 가능합니다. 일본 대학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든 넓은 세계의 무대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3명 낸 일본 나고야대학

그가 바로 일본에 16번째 노벨상을 안겨준 시모무라 오사무(下村脩·80) 미국 우즈홀해양생물연구소 상임연구원이다. 일본에서도 시골이나 마찬가지인 나가사키는 지금도 일본 패망 직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군 기지로 쓰이는 항만을 빼면 번듯한 공장이나 빌딩도 많지 않다.

시모무라는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1945년 8월 9일 사세보 해안에 인접한 군수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17살이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나가사키대 약학부를 졸업한 뒤 60년 미 정부가 지원하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50∼60년대 일본은 연구시설이나 장비가 파괴되고 없거나 부족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부나 연구를 할 수 없었다.

일본 남부 나고야(名古屋)대에서 박사 과정을 취득한 시모무라는 미 프린스턴대·보스턴대 등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의 저력은 일본인 특유의 탐구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에서 나왔다. 그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이유는 62년 해파리에서 녹색형광단백질(GFP)을 발견해 질병 치료에 실용화했기 때문이다. 이 물질은 자외선을 쏘이면 녹색 빛을 발한다. 암세포 등에 투입해 질병을 추적하고 치료 방법을 찾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어릴 때 놀잇감으로 쓴 하찮은 해파리가 노벨상을 안겨준 것이다.

일본인들의 기초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은 이처럼 해파리와 같은 일상 생활에서 접하고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실험 재료와 아이디어가 원동력이 됐다. 올해 네 명의 수상자 중 한 명인 시모무라는 현재 일본 연안에서 잡히는 ‘반딧불 오징어’에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64) 일본학술진흥회 이사,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68) 교토산업대 교수팀도 일상에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결정적인 발견의 계기가 됐다.

마스카와 교수는 집에서 목욕을 하던 중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새로운 소립자 구조 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평소 끊임없이 생각하던 소립자의 구조를 거듭 생각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계산할 필요도 없이 사고력으로만 입증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물리학상을 받은 난부 요이치로(南部陽一郞·87) 교수도 마찬가지다. 물질이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전환되는 것은 단순한 현상이지만 원리 입증은 물리학계의 난제였다. 난부 교수는 어느 날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한 명이 오른손으로 집어 들자 순차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오른쪽에 있는 냅킨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 대칭이 비대칭으로 전환되는 원리를 풀게 됐다.

올해 일본 학자들의 노벨상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해외에선 무명이나 다름없는 나고야대가 한꺼번에 세 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점이다. 물리학상을 받은 고바야시·마스카와는 나고야대 이학과를 졸업했다. 화학상을 받은 시모무라도 박사 학위를 나고야대에서 받았다. 기초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는 나고야대를 비롯해 모두 옛 제국대학에서 배출됐다. 도쿄대가 네 명, 교토대가 다섯 명, 도호쿠대가 한 명이다. 이들 4개 대학 외에 오사카·규슈·홋카이도대 등도 옛 제국대학에서 전후 국립대로 전환된 대학들이다. 일본은 패망 뒤에도 이들 7개 대학을 통해 경제 재건과 부국강병을 이끌 인재들을 길러냈다. 특히 도쿄대는 일본의 간판 대학이자 자존심이라는 이유로 이들 국립대 가운데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는 교토대가 다섯 명으로 더 많고 나고야대도 사실상 세 명을 배출했다.

나고야대의 강점은 무엇일까. 나고야대에서 1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던 요코하마대 조두섭(경영학부) 교수는 이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해줬다. “도쿄대는 정부의 지원을 집중적으로 받지만 정부의 요구도 많이 받는다. 연구과제를 많이 받고 간섭도 많이 받기 때문에 느긋하게 연구하는 게 쉽지 않다. 일본의 간판 대학이다 보니 학문의 유행을 잘 타는 것도 깊이 있는 연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논문 수는 일본에서 가장 많지만 정부가 주문한 연구과제들이 많다.”

반면 나고야대는 지방에 있어 유행을 타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조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에서는 테뉴어(종신 교수직)를 한번 받으면 65세까지 보장되고 정년 뒤에도 명예교수로 70세가 넘도록 연구활동이 가능하다. 나고야대에 있을 때 이공학부 교수들 중에 한 가지 연구주제를 30년 이상 파헤치는 교수들이 수두룩했다. 전임강사만 되면 사실상 종신고용을 보장받기 때문에 호흡이 긴 연구에는 나고야대 같은 곳이 최적의 공간이다.” 패망 이후 기초과학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헝그리 정신’이 기초과학 발전의 원동력이지만 한 가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에도 비결이 있는 것이다.

조 교수는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했다. “한국은 대학에 과도한 경쟁 체제를 도입해 절대로 호흡이 긴 연구를 할 수 없게 됐다”며 “미국에서는 경쟁 체제가 치열하지만 학문의 저변이 넓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기초과학 분야는 갈수록 고도화하면서 수천억원짜리 실험장비로 검증해야 하는 이론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의 정부·민간 연구개발비 총액은 일본의 5분의 1 수준인 286억 달러(2006년 기준)에 불과하다. 조 교수는 “한국은 반도체나 유기EL(발광다이오드) 등 경쟁력을 갖춘 산업 분야에서 노벨상에 도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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