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화地圖>27.영화-로맨틱 코미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충무로에서 뚝심 있기로 이름난 젊은 제작자 안동규(영화세상 대표)씨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의 개봉일에 극장 관객석이 텅 비어 있음을 목격하고 집에 와서 『화살이 머리에 꽂히는 듯한 통증을 겪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뻔한 얘기지만 감독에게나 제작자에게나 영화의 흥행 실패는 비할 바 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세계 영화작가의 「스승」가운데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존 포드 감독조차 『우리의 직업에서 예술적 실패는 아무 것도 아니다.그러나 상업적 실패는 중대하다』고 단언했 을 정도다.
할리우드에서든,충무로에서든 영화를 만드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피말리는 모험이다.고매한 예술으로서의 영화만 고집하는 소수를 제외한다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변함없는 숙제는 흥행의 공식을 찾아내는 일이다.일정한 수 이상의 관객을 끌 어들일 수 있는 스토리와 테크닉의 정형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영화 제작진은흥행 실패의 공포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장르는 여기서 비롯된다.서부극이니,멜로드라마니 하는 영화 장르들은 영화제작자들이 안전한 흥행을 위해 고심 끝에 만들어낸 정형 또는 관습의 체계다.
할리우드에서처럼 정교하지는 않더라도 충무로에도 장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어 왔다.영화평론가 김정룡씨는 다소 도식적임을 전제한 뒤 충무로 장르의 주요한 흐름을 60년대 순정형 가족드라마,70년대 호스티스물,80년대 멜로드라마로 정리 하고 있다.
『박서방』(60년),『별들의 고향』(74년),『겨울나그네』(86년)등이 이 경향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90년대 벽두 충무로가 새롭게 발견한 장르가 바로 로맨틱 코미디다.『결혼 이야기』(김의석 감독.92년)가 코믹 멜로라고도불리는 이 장르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서울에 사는 젊은 부부의애정 풍속도를 코믹 터치로 그린 『결혼 이야기 』는 52만명(서울 개봉관 기준)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라 흥행 압박에 시달리던 충무로를 들뜨게 했다.집을 나간아내 대신 아기를 키우는 젊은 회사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스터 맘마』(강우석 감독),한 아 파트 내에서 벌어지는 청춘 남녀의 로맨스를 그린 『아래층 여자 위층 남자』(신승수 감독)등 흥행작들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화」를 가속화했다.
93년에는 한국영화 흥행 10위 안에 『그 여자 그 남자』『가슴 달린 남자』『백한번째 프로포즈』『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등 이 경향의 작품 네편이 오름으로써 곧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를 맞았다.94년 이후 다소 주 춤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닥터 봉』(95년),『코르셋』(96년)등의 히트작을 이어오며 신인에게나 중견에게나 이 장르는 여전히 가장 안전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적인 전략은 말 그대로 유머와 로맨스(또는 섹스)의 결합이다.90년대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는 남녀간 로맨스를 애상조의 지순한 애정이 아니라 경쾌한 유희의 과정으로그려냄으로써 80년대 멜로드라마의 신파적 전통과 결별한다.많은경우 여기에 섹스에 관한 「수다」가 양념으로 곁들여진다.
『결혼 이야기』에서 최민수와 심혜진은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청혼하고 수락하며,섹스하고 싶을 때 조명과음악의 별다른 도움없이 곧바로 해치운다.별거를 결정할 때도 그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두 사람을 잇는 실질적인 끈은섹스와 농담일 뿐이다.로맨스의 감상성이 말끔히 제거된 두 남녀의 코믹하고 가벼운 사랑게임은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는 멜로드라마의 신화를 해체해버렸다.
『결혼 이야기』의 사랑법은 개인적 욕망이 집단적 대의를 대체하고 성적 담론이 정치적 담론을 압도해버린 90년대 사회상을 비교적 정확히 반영한다.음란한 싸구려 코미디라는 일부 평자들의비판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야기』는 급변하는 시 대의 감수성을제대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영화였다.
로맨틱 코미디 붐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것 말고도 『결혼 이야기』는 「감」이 아닌 과학적 기획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성공적 「컨셉트 무비」로 기록된다.이 작품의 기획을 맡은 신씨네는영화를 만들기 전에 10여쌍의 젊은 부부를 면접 해 그들의 일상적 쾌락과 갈등을 취재한 다음 이를 시나리오에 반영하는등 면밀한 준비작업을 거쳤다.
영화도 하나의 기획상품이란 신씨네의 사고는 『결혼 이야기』『미스터 맘마』『백한번째 프로포즈』『구미호』『은행나무 침대』등을통해 성공적인 흥행 성과를 낳으면서 신진 기획자들의 작업방식에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지난 7월 개봉돼 13만 명의 관객을 모은 로맨틱 코미디 『코르셋』(명필름 기획)도 연인원 5천여명의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10여차례 설문조사 끝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컨셉트 무비였다.
한국의 영화제작자들에게 로맨틱 코미디의 힌트를 제공한 영화는『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89년)라는 것이 정설이다.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남녀의 로맨스를 잘 짜인 시나리오와 정갈한 화면에 담아낸 이 영화는 관객 5만명을 넘기지 못 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해를 넘기며 3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섹스에 관한 파격적인 농담,일상의 틀을 위협하지 않을 만큼만절실한(따라서 훨씬 가벼워진) 사랑이란 이 영화의 특징적 요소는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에도 교의처럼 반복된다.
로맨틱 코미디 붐은 그러나 시발점이 된 『결혼 이야기』외엔 별로 주목할만한 작품이 등장하지 않은 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태생부터 기획상품의 성격이 짙었던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는 감독이 자신의 개성을 불 어넣지 못하고 주어진 아이디어에 장르적관습을 기계적으로 결합하다보면 소멸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큰 장르다. ***『해리가 셀리…』서 힌트 말장난에 불과한 성적 유머의 남용은 부실한 시나리오의 빈발과 함께 이 장르의 활력을위축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전편에서와 같은 성공을 기대하며 내놓은 『결혼 이야기2』(94년)의 흥행 참패는 장르적 관습의안일한 반복이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의 한 사례다.홀아비 치과의사와 노처녀의 로맨스를 그린 『닥터 봉』은 비교적 잘 만들어진로맨틱 코미디라는 평가를 받았다.95년의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흥행성적이 좋았던 이 영화는 억지 유머가 자제된 군더더기 없는구성 에 유려한 카메라 워크가 돋보였다.하지만 이 장르의 관습을 개성있게 재해석했다고 보기는 힘든 무난한 작품이다.95년엔『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가 흥행10위 안에 올라 로맨틱 코미디의 건재를 과시했으나 작품성은 평가받지 못했다.
94년부터 충무로 장르의 지형은 뚜렷한 변화 양상을 보인다.
『장군의 아들』(91년.임권택 감독)과 TV 미니시리즈 『모래시계』 선풍 이래 『테러리스트』『본 투 킬』『런어웨이』등 액션영화가 주류 장르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 먼저 눈에 띈다.코미디 소재가 로맨스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마누라 죽이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을 재치 있게 뒤집어 재미를 본 영화며,『투캅스』『돈을 갖고 튀어라』등은경찰의 행태와 범죄를 소재로 했다 는 점에서 범죄 코미디로 부를만하다.
상대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제 한물 갔다고 말하기는 힘들다.올해 상반기만해도 『코르셋』『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가 개봉돼평균 이상의 관객을 모았으며,하반기에도 두세편 이 개봉될 예정이다.『그 여자 그 남자』『코르셋』을 기획했던 명필름의 심재명씨는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안정적 장르로 자리잡았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작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로맨틱 코미디의 「상품성」은 무엇보다 어떤 장르보다 관객층의폭이 넓다는데 있다.특히 극장 관객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20,30대 여성에게 호소력이 크다.제작비가 다른 장르에 비해적다는 점도 제작자에겐 큰 매력이다.액션이나 시대극에 비하면 특수효과.대규모 세트.군중 신등이 거의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로맨틱 코미디가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기획자와 스타의 영화로 남아있는 한 앞으로 이 장르에서 의미있는 문화적 텍스트를 낳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허문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