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광희칼럼>사라지는 '스포츠 유산' 많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제51회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한후 경교장으로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金九)선생을 예방한 손기정(孫基禎)감독과 서윤복(徐潤福)선수에게 백범은 묵향 은은한붓글씨 한쪽을 내놓았다.독특한 필세(筆勢)의 그 것은 격려금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격조와 정신이 담겨져있다고 손기정씨는 당시를 회고했다.
『발로 천하를 제패한다』(足覇天下).해방직후의 혼돈속에 한 청년이 이룩한 쾌거에 대한 백범의 감개가 이 속에 함축돼 있는듯하다.발로 천하를 제패한 것은 손(孫).서(徐)양씨에게 모두해당되는 말이지만 백범의 선물은 서윤복일가의 가보 제1호가 되었다.이에 앞서 손기정씨에게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었다.33인의 한분이며 명필로 정평나있던 오세창(吳世昌)선생의 천하제일준족(天下第一駿足)이라는 휘호다.
세계 마라톤계를 석권한 두사람에게 이같은 선인들의 각별한 배려는 평생두고 간직해야할 감격이었지만 묘하게도 그 귀중품은 약속이나 한듯 지금은 두사람의 수중에 없고 행방이 묘연하다.서윤복씨의 경우 6.25때 마당 깊숙이 묻어둔 것이 수복후 온데간데 없었다는 얘기고,손기정씨는 3공시절 모 실력자에게 강탈당하다시피 해서 손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 『足覇天下』나 『天下第一駿足』은 마치 「백악관의 성냥」처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양식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에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백악관마크가 찍힌 성냥이 번번이 없어지자 미국 대통령비서실은 성냥 겉에다 『이 성냥은 도난당한 것임 』이라고 적어 예방효과를 올렸다는 얘기다.이 두 족자는 말하자면 우리가 공유해야할 사회적 자산이란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9일 한국체육인동우회(회장 辛道煥)가 주최한 베를린올림픽마라톤제패 60주년 기념행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동우회는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씨가 받은 금메달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두 개의 순금메달을 만들어 손기정씨와 남 승룡(南昇龍)씨에게 전달했다.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비록 소품이기는 하지만 손기정씨의 발바닥 본을 뜬 키홀더와 비장의 사진을 모아만든 화첩을 받아들고 다시한번 역사적 자료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제패 이래 60년,한국스포츠는 세계10강자리를 굳혔는가 하면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이어 2002년 월드컵축구를 일본과 공동개최하는등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할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손기정.서윤복씨의 경우처럼 1백26명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4백44명에 이르는 체육연금 수혜자들,그리고 피라미드의저변에 이르기까지 숱한 스포츠문화의 흔적과 사연들이 사장되고 흩어져 이렇다하게 내놓을게 없는 것이 우리의 ■ 실이 아닌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명예의 전당이나 스포츠박물관의 확보가 그래서 필요하다.

김광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