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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풍경] 시계수리 36년 빈영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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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서울 역삼동 스타타워 5층의 한국 롤렉스 애프터서비스 센터. 40대 주부가 가방에서 흰 비닐 봉투를 꺼냈다. 안에 든 것은 며칠 전 불이 나 잿더미가 된 집에서 건진, 결혼 패물 롤렉스 시계였다. 다른 세간은 전소됐다. 그나마 찾은 시계마저 시커먼 숯덩이였다. 여기가 시곗줄이고 여기가 숫자판이란 것 정도나 알아 볼 상태였다. 그래도 결혼 기념품이라 '혹시'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인제에서 서울 강남까지 찾은 것이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주부의 앞에 나타났다. "가망이 있을까요"라는 물음에 그가 시계를 찬찬히 훑어 보곤 말했다. "좀 오래 걸리겠습니다."

시계를 분해한 뒤 녹아버린 부속은 스위스 본사에 주문하고, 나머지는 잘 손질해 다시 짜맞추는 작업이 시작됐다.

두달 뒤 "다 됐다"는 연락을 받은 주부가 다시 한국 롤렉스에 왔다. 앞서의 그 남자가 시계를 보여줬다. 그가 무슨 연금술이라도 펼쳤던 것일까. 금시계가 형광등에 번쩍였다. 순간 주부의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똑같네!"

"거 참 신통하데요. 10여년 전 패물로 받을 때 모습 그대로더군요. 전 틀림없이 엉망이 된 숯덩이를 건넸는데."

수리를 부탁했던 박선선(44)주부는 당시의 경험담을 이렇게 얘기했다. 그건 시계를 고친 사내에게도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가망 없는 환자를 살려낸 의사같았다고나 할까요."

한국 롤렉스의 애프터서비스 및 수리 책임자인 빈영철(51)부장. 그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시계, 그것도 롤렉스에 관한 한 허준 같은 명의라니까요."

시계 수리에 발을 들여놓은 지 만 36년, 롤렉스만 맡은 것이 만 27년이다. "그간 내 손을 거쳐간 롤렉스가 5만개를 넘는다"고 한다.

전북 장수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엔 축구 선수를 꿈꿨다. 초등학교.중학교 때는 학교 선수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러다 중3 때인 1967년 왼 다리 골수염에 걸렸다.

"축구뿐 아니라 학교도 그만둬야 했지요. 변변한 대중 교통도 없던 때인데, 불편한 다리를 끌고 먼 학교까지 갈 방법이 없어서…."

불편한 다리를 끌고 그저 농사일이나 좀 거드는 생활이 1년 넘게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친한 친구가 찾아왔다. "넌 다리가 불편하니 앉아서 하는 일이 좋지 않겠느냐. 마침 우리 형이 시계포를 하니 시계 고치는 일이나 배워라"고 했다. 친구의 권유에 몇번 시계포에 갔지만 이내 그만뒀다.

"운동을 하던 성격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영…. 그냥 동네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면서 어린 나이에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조금씩 타락해 갔지요."

어느 날 집에 있는 데 어머니의 시계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쌀 몇가마니를 주고 사왔다는 시계였다. 뜯어보고픈 욕구가 생겼다.

"엄니, 이거 한번 뜯어 볼래요." 뜻밖에 선선한 승낙이 돌아왔다.

당시 그의 실력은 시계 고치는 광경을 몇번 어깨너머로 보며 익힌 것 뿐. 뜯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다시 맞춘다는 것은 무리였다. 분해된 시계는 종이에 둘둘 말아 구석에 감췄다. 가끔씩 다시 꺼내 맞춰보기를 두달여. 제대로 맞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계가 제 모습을 갖추고 움직였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망가진 시계도 다시 제대로 가는데, 술마시고 방황하는 나도 스스로를 고치면 제 일을 할 수 있겠구나'."

68년 이모가 있는 수원으로 왔다. 수원 영동시장에서 식당을 하는 이모가 아는 시계방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한 것.

견습 생활이 시작됐다. 아직 시계를 직접 만질 수는 없었다. 고치는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다.

가게가 문을 닫은 오후 10시 이후에야 그의 시간이 됐다. 새벽 2시, 3시까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수리공이 분해한 상태로 놔둔 시계들을 들여다봤다. 딱딱한 의자 탓에 며칠 안 가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 빨래를 해주던 이모는 "왜 요즘 빨래를 안 내놓느냐"고 의아해했다. 실은 진물과 고름이 묻은 속옷을 들킬까봐 감춘 것이었다.

1년8개월 만에 '마스터'라 불리는 수리공 최선임이 됐다. 그 뒤 수원 지역의 몇몇 시계포에서 일하면서 '용한 시계 의사'로서의 이름을 쌓아갔다. 그러다 77년 롤렉스가 한국에 수리센터를 내면서 그리 들어갔다. 롤렉스와 관계 있던 친구의 소개를 받았다.

"70년께인가, 수원에서 롤렉스 수리를 맡게 됐어요. 이게 말로만 듣던 롤렉스구나 하는 생각에 손도 못 대고 30분 넘게 가만히 쳐다만 봤죠. 그러다 시계 딱지를 열었는데 꽉 짜인 부품들이 주는 그 느낌이란. 그 순간 롤렉스에 매혹돼 버렸죠. 그런 저한테 롤렉스에서 일하라는 제의가 왔으니 덥석 받아들일 수밖에요."

롤렉스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단골도 많이 생겼다. 오명숙(71.서울 도곡동) 할머니처럼 수리를 맡길 때면 과일이나 케이크를 사들고 오는 사람도 있다. 박종만(54.기업인)씨는 가끔씩 해외출장 갔다올 때 선물까지 사온다. 박씨는 "국내 대기업의 일본 법인에 근무할 때 일본 롤렉스에서도 AS를 받아봤지만, '장인정신의 나라'라는 일본의 롤렉스에도 빈부장처럼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은 없었다"며 "그 성품에 반해 아우 삼게 됐다"고 했다.

아직 고치지도 않았는데 수리를 맡기면서부터 '고맙다'고 하는 고객도 있었다고. 성묘 가서 벌초하다 풀 깎는 기계의 날이 돌에 부딪혀 부러지며 튀었는데, 시계만 좀 망가지고 팔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쌍으로 수리가 들어오는 것은 백이면 백 부부싸움의 소산이란다. 한쪽이 화난다고 배우자의 패물 시계를 냅다 던지면, 반대 쪽도 질세라 맞던지는 경우라는 것.

가끔씩 어떤 손님은 시계를 고친 뒤 가격란에 '서비스'라 쓰인 영수증을 받아들기도 한다. 빈부장은 "보증수리 기간이 지나도 고객의 잘못이 없었다면 무료로 고치는 게 롤렉스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롤렉스의 철학'이라는 대목에 유별나게 힘을 주는 빈부장. 그러나 그게 그 자신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글=권혁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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