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중동 통합 이끌 지도자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중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전쟁이나 테러 공격, 실패한 평화협상 같은 소식들이 언제든지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중동은 많은 갈등 속에서 변화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중동의 고질적인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오스만튀르크제국, 대영제국, 그리고 지금의 미국까지 여러 강대국이 중동 문제에 개입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냉전이 국제사회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로 나눴어도 중동은 변함이 없었다. 중동 사회 자체도 역동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변화가 불러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중동에서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강대국의 개입이 아니라 세계화와 기후 위기 문제가 변화를 이끌고 있다.

산유국을 중심으로 세계화는 중동의 경제와 문화 환경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산유국에서 넘쳐나는 돈은 아프리카 북서쪽 모로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덕분에 모로코는 유럽의 영향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중동 사회에는 변화와 경제 현대화를 가로막는 지배 구조 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모순이 존재해 왔다. 문화적·종교적 보수주의 성향과 사회적·규범적 변혁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찾을 수 없다면 이러한 모순은 새롭고 추가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기후 문제도 중동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대부분 지역에서 해수면 상승과 온난화로 사막화와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중동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영토 분쟁 때문에 생겼다. 그런데 물 없는 땅은 앞으로 분쟁거리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산업·농업·관광이 발달할수록 물은 더 필요하다.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 수준도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물을 더 소비할 것이다. 그래서 물 부족은 중동의 가장 핵심적 문제가 될 것이란 전망이 이젠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기름 매장량 못지않게 물 부족 문제가 중동의 지형을 뒤바꿀 것이다.

이처럼 세계화가 진행되고 물 부족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국가 간 협력에 대한 요구도 늘어나고 있다. 특정 국가가 개별적으로 해당 현안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유럽연합(EU)이 어떻게 성공의 길을 걸었느냐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나 종교 문제를 봤을 때 유럽은 중동보다도 통합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초반부터 통합을 향한 노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장 모네가 제안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노력의 첫 결실이다. 그는 유럽 통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래서 나는 중동 물·에너지 공동체 출범을 제안하고 싶다. 공동체는 향후 경제적인 국경이 사라지는 공동 시장으로 발전하고 안보 협력도 강화할 것이다. 통합된 공동체로 세계시장에서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지역 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협력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유럽도 중동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한다. 유럽도 오랜 기간 ‘전쟁의 대륙’이란 소리를 듣지 않았는가. 유럽은 성공의 비법을 전수해야 한다. 그리고 올 7월 출범한 지중해연합(UPM)도 도우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동안 변화의 무풍지대였던 중동에도 긍정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장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통합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통합을 이끌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통찰력, 그리고 인내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 중동에도 장 모네 같은 지도자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

정리=강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