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환율 방어보다 외환보유액이 중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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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의 구제금융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 정부가 긴급 외환수급 대책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국내 금융시장을 휩쓸고 있다. 증시에서는 주가가 연중 최저치로 떨어지고 외환시장에선 원-달러 환율이 연일 폭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다간 자칫 금융위기가 정말로 국내에서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세계적인 신용경색 속에 빚어지고 있는 극심한 달러 가뭄과 환율의 이상 급등 현상이다. 외화 부족 사태가 계속되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시중 은행장들을 불러 외화 조달을 위한 자구 노력을 당부하면서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은행에 대해서는 페널티 금리를 부과하겠다”는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은행의 외화 조달을 독려하기 위해 채찍을 꺼내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화 부족 사태가 개선될 가망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이 와중에 외환시장에선 외환 당국의 간헐적인 시장개입에도 환율 급등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다.

우리는 이 같은 시장의 불안이 근본적으로 정부의 신뢰 상실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이 정부가 집권한 이후 보여온 환율정책의 혼선이 정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시장의 변동에 휘둘리지 않는 의연한 자세와 일관된 정책기조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면밀한 상황 판단과 함께 분명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 상황의 변화에 대해 구구한 해명을 하기보다는 확고한 원칙에 따라 일관된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현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대외지급결제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동시에 환율 방어에 외환보유액을 축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비상시 대외결제용으로 쓰기 위한 외환보유액은 실수요 대외지급 자금으로 아낌없이 지원하되, 일시적인 환율 상승을 무릅쓰고라도 효과없는 외환시장 개입에 아까운 외환보유액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환율 방어가 아니라 외환보유액을 지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