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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오보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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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있다. 세계 3대 앙상블인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다. 단원들이 매번 투표로 악장(樂長)을 뽑아 공연을 이끈다. 중앙집권적인 지휘자의 통제는 없다. 화려한 기량의 연주자들이 오묘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미국식 시장자율주의인 셈이다. 이 오케스트라가 지키는 단 하나의 의무는 튜닝이다. 모든 악기의 기본음을 맞춰야 불협화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이 오보에라는 목관악기다.

오보에는 한때 중세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영혼을 앗아간다”는 혐의를 받았다. 너무 아름답고 애절한 음색이 신성함과 부딪친 것이다. 오보에는 또 인내가 필요한 악기다. 감미롭고 슬픈 선율을 내려면 숨을 오래 참아야 한다. 그래도 살아남은 게 오보에다. 어떤 환경에서도 가장 안정된 음을 내기 때문이다. 교향악단은 연주에 앞서 오보에에 맞춰 튜닝을 한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오보에가 내는 A음에 맞춰 현을 조이거나 푼다.

오케스트라의 경계 대상 1호도 오보에다. 독특한 음색이 다른 악기 소리에 묻히지 않고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오보에를 잘못 불면 역(逆)하모닉스 현상 때문에 전체 공연을 망치는 낭패를 본다. 그래서 오보에는 처절한 구도자적 악기다. 연주자들은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리드(입에 물고 공기를 불어넣는 조각)를 깎고 매만진다. 작은 어긋남조차 엉뚱한 잡소리를 부른다. 전체 음을 조율하면서도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가장 위험한 악기가 오보에다.

최근 미국 금융위기를 보며 오보에를 떠올렸다. 세계 경제는 지난 60여 년간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작은 정부-큰 시장’이나 ‘빚도 자산’이라는 기준까지 앞다퉈 받아들였다. 다행히 오르페우스 오케스트라처럼 지휘자 없이도 별 무리 없이 굴러왔다. 문제는 이번에 오보에가 탈이 난 것이다. 미국 금융이 삐걱대면서 엄청난 굉음을 내고 있다. 노련한 오케스트라는 이럴 때 긴급처방을 한다. 오보에를 손질할 동안 비슷한 음색의 잉글리시 호른이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다른 악기들도 재빨리 그 음에 맞춘다. 지금 구제금융을 퍼붓는 미국은 고장난 오보에와 닮았다. 2000억 달러의 미 국채를 사들인 중국은 잉글리시 호른을 연상시킨다. 이런 공조가 이어지면 파국은 피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세계 경제가 거덜나는 공연 중단은 모두에게 악몽이니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