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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동시 불황 이미 시작 … 앞으로 3~4년은 어두울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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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올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제3회 한·중·일 30인 회의’(중앙일보·니혼게이자이신문·신화사 공동 주최)에서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榊原英資) 와세다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여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시작된 ‘미국발 위기’는 전후 최대 규모다. 아직은 그 영향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올여름부터 사태가 커져 매우 곤란한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최근의 미국발 금융위기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1990년대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의 재무관으로 ‘미스터 엔’이라 불리며 금융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를 3일 오후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개인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끔찍한 세계 동시 불황이 이미 시작됐다”고 잘라 말했다.

 -올 4월 ‘한·중·일 30인 회의’에서 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견한 배경은.

“미국의 주택가격 하락이 2010년까지 멈추지 않고 금융권의 부실채권이 늘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택가격의 선행지수를 분석하니 2010년 5월께까지 계속 떨어지고, 그 이후도 반전을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게다가 10년가량 주택가격이 상승하는 동안 미국의 투자은행(IB)들은 다양한 새 금융공학 기법을 활용해 위험 요인을 지나치게 확대했다. 버블이 꺼지면서 그동안 진행된 증권화·파생상품화의 부작용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이번 사태로 미국식 투자은행의 비즈니스 모델은 붕괴됐다고 본다.”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법안으로 미국이 위기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나.

“어렵다. 문제는 이 법안에 금융회사의 부실자산을 얼마에 사들일까 하는 내용이 적시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민의 세금 부담을 감안할 때 너무 높은 가격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낮은 가격으로 사들이면 역으로 부실채권이 증가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은행에 추가로 자본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이 법안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금융회사에 공적자금이 투입된 90년대 말의 일본처럼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적자금 투입까지는 의회와 유권자의 반발로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6년이 걸린 일본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 기간 금융 불안은 더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 금융위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나.

“최소한 2년은 갈 것이다. 주택가격 하락이 멈추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실물경제도 앞으로 3~4년은 어두운 시절을 보낼 것이다.”

-제2의 세계 대공황이 오는 것인가.

“적어도 전후 최악의 세계 동시 불황이 올 것이라는 건 틀림없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일본은 경기 하락으로 치달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도 현 성장세가 둔화될 것이다.”

-굳이 대공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실은 30년대 대공황 당시와 지금의 금융 부문 상황은 비슷하다. 하지만 지금은 30년대와 달리 중앙은행이 있다. 중앙은행이 열심히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인터뱅크(inter-bank·은행 간 거래)가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미국이나 유럽은 언제 어느 은행이 무너질지 모른다.”

-최근 일본의 노무라 증권이 리먼브러더스 아시아 부문을 인수하고, 미쓰비시UFJ홀딩스가 모건스탠리에 21% 출자하는 등 미국과 일본 간에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나.

“끝났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종언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일본 금융회사는 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면서 위험을 회피해 왔다. 그 덕분에 튼튼해졌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해졌다고는 볼 수 없다. 큰 흐름으로 보면 월가에 집중되던 세계 금융이 일본·중국·아랍 등으로 다극화할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아시아에 미칠 영향은.

“금융회사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실물 부문이 타격을 볼 것이다. 일본·중국·한국의 대미 수출이 크게 줄 것이다. 중국의 경우 연 10% 성장이 8%가량으로 조정될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타격이 더 클 것이다. 중국발 금융위기를 우려하는 지적도 있지만 중국의 경우 대부분 국유은행이고, 당국의 통제가 유효한 체제라는 점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금융위기는 없을 것이다.”

-97년 아시아를 휩쓴 외환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은.

“없다. 실물경제는 타격을 보겠지만 외환위기 같은 금융사태는 없다. 한·중·일 모두 외환보유액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중·일 30인회의’가 각국 정부에 공식 제언한 것처럼 유사시에 대비해 3국이 외환보유액의 5%가량씩 갹출해 공동 관리하는 협조 체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3국 간 금융 협조는 아시아 지역의 안정으로 이어진다.”

-향후 환율을 어떻게 예상하나.

“연말까지 달러당 103~104엔의 틀이 크게 변하지는 않을 듯하다. 한국의 원화는 국제수지와 연동돼 움직이기 때문에 원화 약세(환율 상승)가 진행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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