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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恥部를 성숙하게 감싸안는 향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호 10면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1906)를 쓴 이인직(1862~1916)이 1908년 네 번째 신소설 『은세계』를 발표하고 이와 동시에 최초의 신연극 ‘은세계’가 새로 설립된 근대적 극장 원각사의 무대에 오른다. 탐관오리 손에 아버지를 잃은 옥순·옥남 남매가 새로운 문명 세상(은세계)을 꿈꾸며 미국으로 유학 갔다 돌아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을사조약에서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개혁’을 찬성하던 옥남이 ‘무뢰배’, 즉 의병에게 끌려가는 장면에서 미완으로 중단된다. 제목은 ‘은세계’이지만 실은 ‘암흑세계’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작가인 이인직은 일본 연극계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을 떠나, 실은 이완용의 밀사 노릇으로 분주했다고 짐작된다.

올해 ‘한국 신연극 100주년’을 준비하며 이런 사실에 맞닥뜨린 연극인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 덮어 외면해 버리거나 슬쩍 윤색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세계’의 각색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치부는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1908년 최초의 신연극 ‘은세계’를 통해 2008년 현재 우리 연극에서 희미해져 버린 진지한 시선과 태도를 복원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해의 연극 ‘은세계’는 당대의 광대(배우)들에게 눈을 돌린다. 이 연극은 신연극 ‘은세계’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며, 노래(창)와 결합된 흥겨운 놀이판으로서의 당시 공연 모습을 보여 준다. “이제 왜놈들을 등에 업고 득세한 개화파 놈들이 과거 청국에 붙어먹던 자들한테 한풀이하자는 거 아녀?”라는 어르신의 불같은 호통에 광대는 변명한다. “알잖아요. 우린 다들 홀린 사람들이니까. 신명에 붙들려 놀아나는 사람들 아니에요. (…) 이 일에도 어떤 신명이 있었을 거예요. (…) 우리나 그 양반들이나 그 신명에 놀아난 것뿐이죠.” 왜 정작 나라 도적놈 얘기는 못하고 한물간 세도가들을 공격하느냐는 나무람에는 “복판을 못 때리면 변죽이라도 울려야 안 쓰겄나, 변죽이 울리면 복판도 바르르 떨기는 허지 않겄나, 그런 오기가 나데”라고 한다.

2008년판 ‘은세계’는 이인직이 신문명에 눈뜬 뒤 내버렸던 조강지처가 이인직을 만나 신연극 ‘은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공연되었는지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아내는 나무라고 다독이며 이인직의 울음을 이끌어 낸다. 물론 허구다. 배삼식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내가 지어낸 가장 지독한 거짓말일 것”이라면서도 “그가 걸어간 길을 인정할 수는 없어도 그에게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르고 그 길도 참 꽤나 힘들고 외롭긴 했을 터라 그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어느덧 연민 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토로한다.

100년이 흘러 연극은 현재의 우리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른지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해서 한 친일 행적자는 간단히 매국노로 단죄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불편하지만 아주 미워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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