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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칵테일 사랑? -‘칵테일’(로저 도널드슨·1988)의 칵테일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꽃미남 총각(톰 크루즈)이 군대를 제대하고 뉴욕으로 온다. 돈을 벌어 성공하자! 월가로 가자! 그러나 월가는 학위가 없다고 그를 받아 주지 않는다. ‘직원 구함’이라고 붙은 바에 들어간다.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바텐더가 이상한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큰 잔에 맥주를 잔뜩 붓고 거기에 토마토주스를 또 잔뜩 붓고 다른 술을 조금 보태더니 계란까지 깨 넣는다. 그걸 벌컥벌컥 마시며 묻는다. “레드아이 만들 줄 아나?”

영화 ‘칵테일’에 처음 나오는 칵테일이 ‘레드아이’라는 건 뜻밖이다. 레드아이는 맥주·토마토주스·보드카·날계란을 섞어 마시는 일종의 ‘해장술’이다. 보드카와 토마토주스를 섞은 러시아식 해장술 ‘블러디 메리’에 맥주의 곡기와 계란의 단백질까지 첨가한 미국식 해장술이다. 흔히 칵테일 하면 떠올리는 낭만과 유혹의 분위기와 거리가 있다. 그 술, 혹은 음식이 주는 느낌은 생계의 피곤함이다.

바텐더가 된 주인공은 낮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바에서 일한다.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부음 기사를 써 오라고 한다. 꿈을 구체적으로 새기라는 의미일 거다. 주인공이 쓴 자신의 부음 기사. “향년 99세. 상원의원에 록펠러를 능가하는 부와 명성을 얻은 그는 어제 18세의 일곱 번째 아내와 정사 중에 사망했다.” 젊은 것이, 남자들이란, 쩝.

레드아이를 아침 대용으로 먹는 선배 바텐더가 말한다. “돈을 벌려면 (돈 많은) 여자를 얻어라. 여자의 속옷 색깔을 알 수 있어야 유능한 놈이다.” 농담 같은 이 말이 실제로 영화를 끌고 간다. 갈 길이 멀다 싶어 마음 바쁜 주인공에게 말만 요란한 교수의 모습도 시원치 않게 보이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교수에게 대들었다가 찍힌다. 이 길이 아닌 것 같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또 나이도 한창인지라 바에 손님으로 온 여자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다.

당시에 꽃미남의 대명사였던 톰 크루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영화의 포스터는 상큼한 청춘물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영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긴 뭣하지만, 상큼하다는 수사가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걸쭉한 레드아이가 암시하듯 가난이라는 변수를 자못 진중하게 부각시킨다. 그러면서 돈을 바라는 사랑과, 돈과 무관한 참된 사랑을 주인공에게 제시해 놓고 선택을 요구한다.

조금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완고한 구도다. 하지만 주인공이 참된 사랑을 찾고 성실한 바텐더로 다시 출발하는 엔딩까지, 완고한 시선으로 보면 상큼할 수도 있는 영화다. 문제는 칵테일이다. 마티니·맨해튼·마가리타 같은 고전적인 칵테일들은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핑크 스퀴럴·오르가슴같이 크림 술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이나 열대 과일주스를 많이 첨가한 신식 칵테일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나오는 칵테일들은 당도가 높다. 또 손님들이 칵테일을 마시는 모습은 화면에 거의 잡히지 않고, 두 바텐더가 셰이커와 술병을 던지고 받으며 칵테일을 만드는 쇼를 화려하게 연출한다.

톰 크루즈와 선배 바텐더로 나온 브라이언 브라운이 펼치는 이 저글링 쇼는 1980년대 후반 젊음의 열기를 상징하는 한 장면으로 남으면서 영화에 폭발적 흥행을 가져다줬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칵테일을 둘러싼 외형적 이미지들을 차용할 뿐 칵테일의 맛과 향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칵테일이 자주 나오는 만큼 칵테일에 관한 몇몇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레드아이 같은 해장 칵테일이다. ‘칵테일’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선 설들이 정말 많다. 스페인 점령군에 혼합주와 함께 상납된 원주민 공주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미국 시민전쟁 때 군인들이 상대 진영에 있던 민가의 닭을 훔쳐 잡아먹고 그 꼬리털을 잔에 꽂아 건배한 데서 유래했다, 투계를 할 때 싸움닭에게 혼합주를 먹인 데서 비롯됐다, 술통 밑바닥에 남은 찌꺼기를 ‘테일’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됐다 등등. 그런 설들 중 하나가 수탉이 ‘꼬꼬댁’ 하고 울 때 마시는 해장술을 닭에 빗대 칵테일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칵테일 1번 타자로 레드아이가 등장한 게 이런 맥락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주인공이 바텐더로 일하기 시작한 첫날, 쏟아지는 주문 가운데 유독 그를 괴롭히는 게 ‘쿠바 리브레’다. 웨이트리스가 빨리 달라고 독촉하는데, 주인공은 어떻게 만드는 줄 모른다. 나중에 알고서 욕을 한다. “X년아, 럼과 콜라라고 하면 됐잖아.”
실제로 쿠바 리브레는 럼에 콜라를 섞고 레몬이나 라임 조각을 빠뜨리거나 즙을 조금 짜 넣는 칵테일인데, 그 기원을 두고 럼주의 양대 브랜드인 ‘바카디’와 ‘클럽 아바나’의 주장이 다르다.

전회에 썼다시피 쿠바의 럼 제조사였던 바카디는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푸에르토리코로 회사를 옮긴 뒤 카스트로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정치 자금을 쏟아 부어 왔다. 반면 역시 쿠바에서 제조되던 클럽 아바나는 카스트로 집권 뒤 제조자가 망명하자 쿠바 정부가 인수해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둘은 원수지간이다.

‘쿠바 해방’이란 뜻의 쿠바 리브레에 대해, 바카디의 주장은 이렇다.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일 때 쿠바 편이던 미군의 장교가 아바나의 한 클럽에 와서 바카디에 코카콜라를 섞어 마시고는 맛이 좋아 사병들 모두에게 권해 마시면서 ‘쿠바 리브레’를 외친 게 이 칵테일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클럽 아바나 쪽은 전쟁은 1898년에 끝났고, 코카콜라가 쿠바에 들어온 게 1900년이기 때문에 바카디의 주장이 틀리다고 한다. 럼에 콜라를 타 먹는 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고 그러느냐 싶지만 쿠바 리브레, 즉 ‘럼 앤 콕’은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엄청 많이 마시는 칵테일이라고 한다.

영화로 돌아와 눈에 띄는 건, 주인공이 여자를 가볍게 만나거나 돈을 바라고 만날 때는 칵테일을 폼 나게 만들어 주는 데 반해 나중에 부인이 되는 ‘참된 사랑’의 여자를 만날 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 여자는 주인공이 “어떤 칵테일을 만들어 드릴까요?”라고 묻자 칵테일을 거부하고 그냥 맥주를 마신다. 이건 뭔 의미인가. 칵테일에 속아 맺어진 사랑은 가짜다?

이처럼 영화 ‘칵테일’엔 칵테일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있다.
이 영화를 위해 비치보이스가 부른 ‘코코모’라는 노래가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걸 빼고, 이 영화가 받은 상은 가장 나쁜 영화를 골라서 주는 ‘골든라즈베리상’의 최우수 나쁜 영화상과 최우수 나쁜 각색상이었다. 영화도 겉 다르고 속 다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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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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