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레코드 연주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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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차엔 내장된 카 오디오, 사무실에선 PC, 간편한 MP3 플레이어…. 휴대전화만 켜도 음악이 나온다. 첨단의 혜택을 세계 제일선에서 누리는 우리의 뮤직라이프 실태다.

온갖 수단이 넘치는데 음악은 왜 멀리 있을까. 실연의 감흥만이 음악 수용 방법은 아니다. 사랑한다면 곁에 두고 더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사랑은 추상적 관념만으론 모자란다. 바로 느끼고 만져지며 울고 웃으며 뒹굴어야 충족된다.

멀리 있는 연인은 아련하기는 할망정 살갑지 못하다. 어쩌다 한번 듣고 느끼는 저릿한 감동은 진정한 음악 사랑이 아니다. 음악은 공기처럼 호흡되고 시계처럼 손목에 차고 다녀야 제 것이 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알아도 낯설며, 편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불화를 일으킨다.

오디오 기기가 유럽과 미국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우리보다 그들의 음악 수준이 낮거나 실연 무대가 멀어서는 아닐 것이다. 객관적 문화전통의 깊이나 향유의 방법이 훨씬 촘촘하고 세련된 서구 지식인의 합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오디오는 단 한 번뿐인 음악의 벅찬 감동을 반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좋은 것을 지속시키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란 다 똑같다.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고 언제든 보고 만지고 얘기하고 싶은 본능처럼. 곁에 있는 음악은 감동과 넌덜머리가 교차되고 달콤함과 씁쓸함을 넘나든다. 사랑은 한 가지 형태로 고정돼 있지 않아야 드라마틱하다.

오디오의 과신을 물신주의자의 자가당착이라 비웃는다면 체험의 빈약함을 자인하는 꼴이다. 우리는 진정 좋은 오디오 음악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단 한 번의 황홀한 오디오 체험은 실연의 감동만을 외치는 여러분의 생각을 180도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인간은 잘 모를수록 의외로 완고한 거부감을 품는다.

오디오는 1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재생음악을 또 다른 연주로 완성시켰다. 연주자는 음악가의 악보를 해석해 연주한다. 연주자의 기량에 따라 원곡은 천차만별의 형태로 나타난다. 음악의 감흥은 악보가 아니라 연주의 완성도로 좌우되는 것이다.

오디오는 연주자의 좋은 녹음(LP·CD)을 악보로 삼는다. 녹음이란 악보를 오디오 기기로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오디오다. 연주자의 역량만큼 오디오 또한 구사의 역량에 따라 새로운 연주로 태어난다. 연주자의 음악이 자기만의 해석으로 빛을 발한다면 오디오 음악은 기기의 조합과 공간이란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300년 전의 클래식 음악이 오늘까지 살아 숨쉬는 힘은 바로 연주자의 몫이다. 음악의 위대함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는 점 아닐까. 단 하나만의 형태로 굳어 있는 고전은 시간을 통해 교류되지 못한다. 연주자의 새로운 해석이 낡은 음악을 현재에 되살리듯 오디오는 연주를 재해석해 음악의 영원성을 이어나간다.

오디오의 실체는 관념의 세계를 뛰어넘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 준다. 오디오로 연주되는 음악은 섬세한 떨림과 뉘앙스를 실제보다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 격렬한 피치카토의 행간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듯한 음향 쾌감은 실연 이상의 도취로 다가온다.

정밀한 음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주 장르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레코드 연주가’란 신조어는 이래서 설득력을 지닌다. 도구의 이상과 인간의 감성이 어우러졌을 때 예술의 디테일은 충실히 채워진다. 최고의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니에리는 이탈리아 장인의 솜씨다. 오디오의 장인은 마란츠7을 만들었고, 오디오 리서치를 만들었으며 탄노이 스피커를 만들었다.

나무의 재질과 화산재 섞인 페인트가 과거 신비의 울림을 만드는 비결이다. 오디오는 더 민감한 증폭 소자와 저항과 콘덴서 같은 재질로 방법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상을 향한 인간의 도전과 성취의 지향은 변함이 없다. 음악의 지향으로 우리는 고도의 인간정신에 다가선다. 완성의 형태와 끝이 있을 리 없다. 음악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아 숨쉴 때 더 위대하게 다가온다.

윤광준 사진가·오디오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