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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57. 통일 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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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1963년 ‘사상계’목차에 필자가 쓴 연재소설 ‘승자와 패자’의 제목이 실려 있다.

장자(莊子)는 역시 훌륭한 말을 했다. 자세시대자(自細視大者)는 부진(不盡)이라.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보면 끝이 없느니라. 해가 저물어간다. 이제 좀 덤성덤성 뛰어가야 하겠다.

'이 생명 다하도록'에서 시작해 '현해탄은 알고 있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 마후라' '남과 북' 에 이르러 나는 체통이 좀 섰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당대 최고 지성지(誌)를 자부하는 '사상계' 측에서 '아로운전 3부'를 싣겠다고 제의해와 기뻤다.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도망쳐 광복군이 된 사주 장준하씨의 경력 때문에 그랬을까. 선우휘씨는 '성채(城砦)'를, 나는 '승자와 패자'를 연재했다.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건너편에 공화당이 있었다. 김종필씨(JP)가 버티고 있었다. 어느날 누군가 나를 끌고 가 JP 앞에 앉혔다. 나를 데리고 간 사람이 신동준씨인지 박일영씨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JP가 매우 날카롭고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초면에 바둑을 두자고 했던가. 재미있었다. 이따금 청구동 자기 집에서 바둑을 두자고 했다. 누가 공화당가(歌)를 지어달라고 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내친김에 '엘리트의 노래'라는 것을 지어 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시대를 이끌어가겠다, 후세에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는 기개를 노랫말에 담았다. 이것이 채택됐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심판'이란 말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대한항공 사장이 된 장성환씨가 이번에는 민간 항공을 위해 하나 써달라고 했다. 대한항공에서 가장 유명한 김양욱 기장을 만났다. 미주(美洲)노선 여객기를 최초로 몬 그의 경험담은 무궁무진했다. 제목은 '캡틴 커피?'. 스튜어디스가 기장한테 이 말을 하면 사랑이 전달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도중에 내가 기절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수원 전투비행단에서 나를 초대했다. 공군의 은인이라며 나한테 술잔을 마구 안겼다. 나는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병원이었다. 링거를 맞고 일어났으나 다음날 작품을 쓰지 못했다. 당시 우리집에 드나들던 국상운한테 시나리오를 대필시켰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동아방송에서의 추억이다.

서영원이라는 작곡가가 한국전쟁 때 연예대로 북에 갔다가 겪은 이야기를 했다. 국군이 한참 북상할 때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가수.배우들과 함께 올라갔다가 당한 이야기다. 제목은 '산하여 미안하다'. 여럿이 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남 덕천에서 박살나 혼자 도망쳐 38선까지 온 악사가 뒤돌아보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뇌까리는 말이 '산하여 미안하다'다.

이것이 여태껏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내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알리는 좋은 소재였는데…. 이것도 동아방송 시절 얘기다. 나중에 알고보니 서영원은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이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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